야천공 신도비에 있는 시 3편
페이지 정보
송촌옹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6-05 15:25 조회1,934회 댓글0건본문
冶川先生의 神道碑에 있는 세편의 詩.
⑴ 무심하면 매번 많이 잊어버린다.
야천선조(冶川先祖)님의 신도비(神道碑)에는 3편의 詩가 실려 있다.
두 편의 시(詩)는 야천선조님이 지으신 詩인데, 신도비를 지은 사암 박순(思庵 朴淳)은 그중의 한편의 詩에서 말하기를,
“그의 글은 평이(平易)하고 전아(典雅)하며, 이치(理致)가 승(勝)하여 글자가 순조로웠고, 詩도 온후하고 평담해서 화미(華美)함을 주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詩를 지어 말하기를 “무심하면 매번 많이 잊어버리는 데 이르고, 뜻을 두면 또한 부자연스럽게 된다네. 긴장(緊張)과 이완(弛緩)이 적당하면 功이 반드시 올 것이니 진실로 허망한 인연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公의 학문은 마음을 잡아 보존함이 정밀하고, 발이 실지(實地)를 밟으니 이미 자족(自足)해서 속임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無心每到多忘了 / 무심하면 매번 많이 잊어버리는 데 이르고
着意還應不自然 / 뜻을 두면 또한 부자연스럽게 된다네.
緊慢合宜功必至. / 긴장과 이완이 적당하면 功이 반드시 올 것이니
寔能除得妄中綠 / 진실로 허망한 인연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其摛文 平易典雅 理勝字順 詩亦溫厚平淡不尙華靡. 嘗有詩曰,無心每到多忘了.着意還應不自然. 緊慢合宜功必至.寔能除得妄中綠. 公之爲學 操存精密. 脚踏寶地 已到自慊 不欺之地矣.
[신도비] 중에서.
이 詩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선비들이 전하여 암송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가 성주(星州)에 사는 제자 성만징(成晩徵)이 경(敬)에 거(居)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문의(問議)하는 편지에 답(答)하기를, “거경(居敬)의 요도(要道)는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시(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하면서 이 시(詩)를 인용하면서 거경(居敬)의 경지(境地)를 말하고 있다.
居敬之要 則朴冶川紹之詩亦可看也。其詩曰云。⟪寒水齋集》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일야기를 꺼낸다. “정위(丁謂)가 구준(寇準)을 참소하여 뇌주 사호참군(雷州司戶參軍)으로 좌천시켰는데, 얼마 뒤에 정위가 애주참군(崖州參軍)으로 좌천되어 갈 적에 뇌주를 지나게 되자 내공(萊公구준의 봉호(封號))이 사람을 보내어 삶은 양(羊) 한 마리를 가지고 가서 그를 뇌주 경계에서 맞아 대접하게 하고, 또 가동(家僮)들에게 원수 갚는 것을 금하였으니, 이는 지난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정위가 만나고자 하니 내공이 거절하였는데, 이것은 오히려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겠는지요. 가령 왕위공(王魏公)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필시 소탈한 모습으로 웃으면서 맞았을 것이니, 후인(後人)들이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하겠는지요.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군자의 후덕한 뜻이지만, 그래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이직보원(以直報怨직도(直道)로 원한을 갚음)만은 못하네. 내 생각에는 거절하는 것이나 맞이하는 것이 모두 후인들의 법이 될 만한지를 모르겠네.” 라고 말하고 있다.
丁謂讒貶寇準于雷州。
後丁謂貶崖州。萊公遣人以一蒸羊逆之境上。又禁家僮之報仇。可謂不念舊惡。而謂欲見則萊公拒之。
此猶有嫌怨之心而然歟。若使王魏公當之則必岸幘迎笑。後人何則。寧人負我。無我負人。是君子之厚意。
而猶不如孔子所謂以直報怨。愚意拒之與迎笑。俱未知爲後人法程也。
⟪한수재집(寒水齋集)》제11권 서(書).
구준(961~1023)은 송(宋)나라의 재상이면서 시인이다. 자는 평중(平仲), 시호는 내공(萊公)으로 구래공이라고 불린다. 여러 관직을 거쳐 두 차례 재상을 지냈고 추밀원사를 한 차례 역임 하였다. 외직으로 나아가 절도사가 되었다. 건흥 원년에 여러 차례 폄적되었다가 마침내 뇌주사호참군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뇌주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민이며 내국공의 작위를 회복하였다. ⟪명심보감》에 구래공의<육회명(六悔銘)>이 전한다.
《類選》 卷8上 經史篇5 論史門
구준은 정위보다 5살이 많았으나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이들의 벼슬이 높아지자 작은 일로 틈이 벌어졌다. 정권에 눈이 어두워진 정위는 재상이었던 구준을 모함하여 건흥 원년(1200년) 진종이 병사하자 뇌주 사호참군으로 폄직하여 좌천시켰다. 그러나 구중궁궐의 음모는 음모를 낳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