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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하다 떠났던 독립가 후손, 한국 국적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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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8-11 07:51 조회2,8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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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찬익선생 외손자[출처: 중앙일보  와<?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독립운동가 家門  아버지  아들 며느리 

 

 

 

 

중국 창춘(張春)시에서 농사를 짓던 중국동포 신강주(63·사진)씨는 일자리

 

를 찾아 1998년 한국에 밀입국했다.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박찬익

 

(18841949) 선생이라고 어머니에게서 들었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 국적 취득을 시도하지 못한 이유다. 서울 성수동의 염색공장에서 일

 

하던 신씨는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자 2003년에 자진 출국했다.그의 외조부

 

인 박찬익 선생은 1919년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독립유

 

공자(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상해 임시정부 외사국장으로 일한 그는

 

1948년 광복 직후 귀국했고, 이듬해 별세했다. 53년에 태어난 신씨는 외조

 

부를 보지 못했다.신씨는 박 선생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2004년부터

 

한국을 오가며 가족을 찾았다. 그의 뿌리찾기는 10년 만인 2014년에 실마

 

리가 풀렸다. 경기도박물관이 박 선생 관련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한

 

신씨가 박물관에 연락했고 사연을 들은 박물관 측이 국내의 박 선생 자손

 

들을 연결해준 것이다.

 


신씨의 가족 관계를 확인한 법무부는 특별귀화신청을 받아들였다. 10일 국

 

적증서를 받은 신씨는 외조부가 싸워 되찾은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받아

 

더없이 기쁘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법무부는 이날

 

신씨를 포함해 독립유공자 후손 38명에게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1907년 네

 

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 선생의 후손 2명과 1908년 서울진

 

공작전을 이끈 항일의병장 허위 선생 후손 8명도 포함됐다. 38명 중 러시

 

아 국적자가 32, 중국 국적자가 5, 미국 국적자가 1명이었다. 정부는

 

2006년부터 독립유공자 후손이 귀화를 요청하면 국적증서를 수여하고 있

 

. 이 절차에 따라 귀화한 이는 모두 1008명이다.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자유와 번영은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 덕분이다. 그들의 자손

 

은 마땅히 국민의 자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출처: 중앙일보] 불법체류

 

하다 떠났던 독립운동가 후손, 한국 국적 얻었다

 

 

 

   독립운동가 家門  아버지  아들 며느리 

박찬익(朴贊翊, 188412~194939)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파(南坡), 아명은 박창익(朴昌益)이다. 본관은 반남.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4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 박원호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07년 초에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박호원 등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야학을 조직하였다.[1]

 


1908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1918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김동삼,조소앙,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1]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3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1]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9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1]

 


임시정부 활동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10월 중국 국민당 제 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1]

 


이후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왔다.[2]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1]

6월경부터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은 김구와 불화가 생겼고, 더욱이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3]

19387월 이시영,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5월에는 김구,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1]

 


해방후

19458.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6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19484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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