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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남양홍씨 할머니 비문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

페이지 정보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9-23 18:43 조회2,498회 댓글4건

본문

합천에 문강공의 배위 남양홍씨 비석을 세울 예정으로 하고 있다.


 


1900년 남양주 금곡의 종산, 반남박씨 묘역

(조선 14대왕 宣祖께서 의인왕후 祖母에게 하사한 위토高宗황제으로 쓰기위해 종산이 모두 국가에 徵發되어 그 곳에 있던 남양홍씨 할머니 ,감정공,활당공 等等 여러 묘가 천묘하였다.


 

천묘 후에 감정공의 묘에는 의 후손에 의해 비석에 세워 졌으나 남양홍씨할머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중

도유사님의 私費, 활당공의 비석은 활당공 후손의 私費로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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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세우는데 비용은 사비를 들여 세우지만 이는 비용을 제공한 개인 소유의 遺物이 아니다.

 

비용은 비록 개인이 제공했지만  남아 있는 비석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세운 다음에는 종중의 유산이다.

 


남양홍씨 할머니의 비문은 소고선생님이 찬한 기록이 소고집에 남아 있어 이를 쓰면 된다.

활당공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찬했다.

그런데 글씨가 문제가 된다.

 


들리는 말로는 글씨를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라고 한다..

서예가가 쓰면 수고비를 주어야 하니까 수고비를 아끼기 위해서 라고 ?

만화 영화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위대하신 선조님의 비석을 세우는데

찬 하신 분들도 보통분들이 아니신데

 


인간이 쓰는 비문이 아니고 컴퓨터 그래픽이라니


비석은 한번 세우면 몇 백 년을 넘어 몇 천년이상 서있는 유물이다.

 


 


이 비석을 세우는데는 후손의 정성과 혼이 배여 있어야 되는데

 


공장에서 물건 만드는 것 같이 세울 것인가

이런 중대한 문제를 대종중 직원 몇몇이 결정할 문제인가 ?

 


김포 대곡동 재각에 현판은 여러 분들의 의견을 공모를 하여 대곡재로 했다..

 


컴퓨터비문에 대하여 몇몇 분의 항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글씨를 쓰는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무슨 수고비가 필요하냐고 반문을 한다.

남양홍씨 할머니의 비문을 쓰는 영광을 왜 돈으로 계산 하는냐고 한다.

한 두 분의 영웅심 때문에 영혼이 없는 비석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목록

민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민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그럼 대부님 시조 할아버지 시제모습은 카메라로 찍지말고 동양화가 초청해서 장면장면 붓으로 그리면 후손의 정성과 혼이 배어있을텐데 왜 못할까요?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제작하는것이 좋지 않을까? "라고 여론을 수렴하자시면서 아래 4줄의 글은 좀 어색합니다. 위치 선정이 잘 못 되신듯합니다.  좀 더 위에 위치 했어야 할 듯 합니다.

박창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박창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Re》민우 님 ,
민우 종친의 의견대로 시조 시제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은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동양화가..... 왜 못할까요? 했듯이 모두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니 한두 장면이라도 그림으로 남긴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듭니다.

민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민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제목이 오류인지 실제 제목처럼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누구도 비석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제작한다고 하신 분은 없는걸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지금 진행하려는 일은 비석에 각자할 글을 컴퓨터 글씨체로 쓴다는 겁니다.

宗緖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본문 처음에, '1900년 남양주 금곡의 종산, 반남박씨 묘역 ~ 그곳에 있던 남양홍씨, 감정공 활당공 등등 여러 묘가 천묘하였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보면 남양홍씨 묘가 현재의 반성부원군 묘 위치 근처가 아니고, 현재의 홍유릉 위치인 금곡리에 있었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히 표현하면, 선조임금때 의인왕후의 할머니이신 정경부인 남양홍씨가 돌아가시어 나라에서 양주 금촌(지금의 일패동 반성부원군 묘역)에 장지를 내렸으며, 홍씨부인 묘를 쓰고, 시묘살이 2년만에 반성부원군이 돌아가서 홍부인묘 뒤 동록에 묘를 썼고, 다시 1년후 감정공 묘를 홍부인 묘 아래에 썼습니다. 그후 졸헌공은 홍부인묘 뒤쪽 서록에 모셨습니다.

1900년에 홍릉(명성왕후묘-청량리)의 기운이 안 좋다 하여 남양주 금곡(현 홍유릉)으로 천장하기로 하고, 반경 2km이내를 해자구역으로 삼으면서 홍부인묘, 감정공묘는 합천으로 활당공 묘는 안산으로, 졸헌공 묘는 파주로, 반성부원군묘는 어딘가로 이장하였습니다.

1910년에 한일합병으로 왕조가 쇠락하니, 해자구역도 해제가되어 반성부원군묘는 1914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반성부원군 사손 박승덕이 1910년경 일패동 종산을 전주이씨에게 매각하여, 반성부원군묘는 남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1969년경 능선 너머 현재위치로 이장하였습니다.

을유보의 홍씨부인 묘산도와 봉분 배치 설명과 갑자보의 반성부원군 묘산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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