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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문강공 야천 박소의 묘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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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18 04:19 조회2,05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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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조당댁 문헌의 기록을 보면 진조당선생과 야천(휘박소)선생과는 우의가 돈독하여 자주 왕래하였고, 후손들까지 신의와 정의를 잊지않고 깊이 간직하고 있다.


야천선생(반남박씨)댁과 우리 벽진이씨 진조당(세칭이광이진사)선생댁과의 세전실화가 있어 기록해본다.
야천선생이 병환으로 임종을 짐작하고 부인에게 말하기를 "성주 이진사댁<생원>에 사람을 보내 나의 임종을 알리고 묘탑를 잡도록 부탁하라고" 하였다.
부인은 즉시 노비를 보내 이 사실을 전하였다.


이 소문을 접한 이진사는 즉시 야천선생댁(합천묘산)을 방문하여 도착하니 야천선생은 이미 운명하셨고 부인이 보고 버선 신은발 그대로 마당까지 뛰어나와 오빠라고 부르며 반갑게 영접하였다.
이진사는 부인과 상의하여 장사는 유월장으로 정일하고 묘탑(묘쓸자리)까지 잡아놓고 "이진사 왈 이 묘탑은 후손중 고관대작이 나고 관료가 이여진다고 예언하였다".


그때 야천선생댁은 가난하여 윤씨라는 인척(관계미상)의 도움으로 가사를유지 해오고있는 행편이였는대 유월장기중에 이 윤씨가(촌수미상)에 초상이 낟는대 이진사가 잡아놓은 야천선생의 묘탑을 양보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부인의 응답이없자 너들은 이진사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겠지만 나는 부탁도 못하니 양보하라고 더욱 강역히 요청하였다.


불득이 부인은 이진사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이진사는 부인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나 그른 묘탑를 다시 구할수 없다고하며 묘책을 알려주었다.
그 묘책은 윤씨가에 그 묘탑를 일단양보 해주고 장일전야에 산아래잇는 소지(小池, 沼池)에서 묘터까지 포대를 깔고 파놓은 묘탑 관구자리에 물을 갓다붓도록 하라고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리하면 윤씨가 와서 이 관경을 보면 필경 행상을 다른산으로 옮겨 갈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노비녀들에게 이진사가 말한 묘책대로 지시하였다.


그 후 윤씨가에서는 장사준비를 마치고 장사당일 행상을 차려 산에 도착하여 파놓은 묘탑 관구자리를 보니 물이 가득히 차있었다.
이 관경을 보고 윤씨는 이진사도 별수없구만 하며 행상을 돌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후 부인은 유월장기를 끝내고 남편인 야천(휘박소)선생의 분묘를 그 자리에 씃다.


 

댓글목록

바른소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바른소리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공의 휘(諱)는 소(紹)이고 자(字)는 언주(彦胄)이며 스스로 부른 호는 야천(冶川)인데, 대대로 한양(漢陽)에서 살았다. 공이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매(姉妹) 및 두 아우와 같이 모두 정경 부인의 슬하에서 자랐다. 연산조(燕山朝) 때 민가(民家)가 많이 철거되어 정착할 곳이 없자 부인이 아들들을 데리고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남하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공의 외가(外家)였다.

공은 빼어난 기질과 특출한 품성으로 인품이 혼연히 이루어져서 어렸을 때부터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었으므로 이미 위인(偉人)과 대기(大器)가 될 줄로 알았다. 나이 겨우 10여 세에 (외조부) 현감 윤공(尹公, 윤자선)이 병환을 앓자 게을리하지 않고 곁에서 모시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으니, 현감 윤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손자 하나를 두었으니, 나의 병이 낫고도 남겠다.”고 하였다.

위 본문에서 인척관계 미상이라는 윤씨는 야천선생의 외가댁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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