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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을 한 환재(瓛齋) 박공 규수(朴公 珪壽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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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21 22:10 조회1,7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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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을 한

환재(瓛齋) 박공 규수(朴公 珪壽) 3.

1854(철종5) 경상좌도 어사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다음 날 아침 일찍 밀양 영남루에서 암행어사 출두야!”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순식간에 관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사 일행이 마패를 내보이며 관아로 행차하니, 갓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옷도 급하게 걸친 아전들이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는 꼴이 가관이었습니다. 밀양부사 서유여(徐有畬)가 황급히 뛰어나와 사모관대에 청색포를 입은 어사를 맞는데 그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하얗던 낯빛이 도로 환해졌습니다.

바로 어렸을 적부터 자식처럼 보아 온 환재(瓛齋)가 아니던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서유여(徐有畬)가 아는 체를 하는데 환재공은 차갑게 외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아 문서를 모조리 가져오도록 지시하더니 불법을 자행한 문서를 낱낱이 가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서유여는 사람들 눈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환재공에게 바싹 다가가 소곤거렸습니다.

환재(瓛齋). 날세. 그만하면 대충 됐으니 어서 안으로 드세나!”

하지만 환재공은 여전히 그를 외면하고 추상같은 표정으로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창고로 가서 장부와 곡물을 일일이 대조하니 그가 적발해낸 불법 문서만도 십여 장이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밀양부사 서유여(徐有畬)의 부정에 관한 소문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 외에도 서유여가 1852년과 1853년에 걸쳐 관속과 민간에서 환곡을 포탈한 금액은 무려 13,000여 냥, 24,000여 석에 달했다. 어사 환재공은 부득이 봉고(封庫)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이에 봉고두 글자를 쓰고 마패로 답인하여 창고문에 붙였습니다. 이어 어사의 권한으로 밀양부사 서유여를 파직시켰습니다.

서유여로서는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이런 부정들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어서 크게 법을 어긴다고 생각하는 이가 거의 없는 지경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유여는 어찌 내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며 환재에게 호통도 치고 애원도 해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환재는 관례에 따라 겸관(兼官)에게 송부하기 위해, 부사 서유여로부터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거두고는 그날 밤으로 밀양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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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소식을 들은 서승보(徐承輔)는 환재공에게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며 절교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환재공은 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서원예(徐元藝 원예는 서승보의 자)는 내가 평소 흠모하던 벗인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절교한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이치가 있는가. 이 적막한 세상에서 문자(文字)에 대해 대화를 나눌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 일 때문에 마음은 근심스럽고 머리는 아프고 복잡하네.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느끼지 못한 채 벽을 돌며 방황하니, 이런 일은 평생 처음 당하네. 아내는 언제나 내가 객지에서 병이 생길까만 걱정할 뿐 이런 괴로운 심정은 전혀 모르고 있네.“

 


그로부터 오랫동안 한양에서는 환재공의 대쪽같은 성품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환재공의 동생 온재(溫齋) 박선수(朴瑄壽)도 훗날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역시 절친하게 지냈던 김상현의 종형을 탄핵 파면시킨 바 있다. 서유여는 당시 파직되었지만 훗날 공조판서까지 지냈다.

서승보는 2년 뒤 과거에 급제해 충청 암행어사로 임명돼어 환재공 못지않은 활약을 했지만 그 후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여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암행어사 임무를 마치며 환재공은 장장 25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사들에 비해 두 배나 많은 분량으로, 그가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하게 임무를 수행했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누누이 밝히고 나름대로 삼정(三政)의 개혁방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3대를 거치는 동안.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한 신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무사안일에 빠저, 개혁을 요구하는 어떠한 소리에도 무감각한 상황에 이르던 겄입디다.

환재공이 크게 우려(憂慮)한 대로 관리들의 수탈과 부정부패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진주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났으니, 바로 진주 농민항쟁(철종 13(1862) 입니다. 이때 환재공은 암행어사 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진주민란의 뒷수습을 위하여 안핵사(按覈使)가 되어 또다시 영남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즈음 환재공은 사상적 전환을 맞았습니다. 다양한 대외활동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목격하게 되면서 그의 사상은 점차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청나라를 방문한 일이었다.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열하(熱河)로 피난하는 위기에 처한 중국을 보면서 환재공은 조선에도 곧 이러한 시기가 올 것을 직감하며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가 왕릉을 도굴하기 위해 무장을 하고 불법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환재공은 평안감사로서 직접 지휘에 나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을 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 환재는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도정치 때문에 정치는 부패해 있었고 민심은 조정을 떠난 상태였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이다.

민심이 조정을 떠났음을 잘 아는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대폭적인 개혁조치를 취했다.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세도정권을 무너뜨리고, 원성이 높았던 환곡제를 폐지하였는가 하면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물렸다.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환재공은 지지를 보냈다. 실학사상을 계승한 환재공은 개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원군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금지하고 서양인들과 교류하는 것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대원군과 마찬가지로 환재공도 외세의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맞서야 하고, 침략해 온 적은 군대로써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항 문제에 관한 한 대원군과 환재공의 생각은 하늘과 땅 차이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서양의 나라들과 평화적으로 국교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여야 한다. 그들은 과학 기술이나 경제, 군사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환재공의 생각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생각은 달랐다.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1872년 환재공은 다시 한번 중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오게 된다. 이 때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더더욱 쇄국(鎖國)이 아닌 개국(開國)을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환재공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원군에게 여러 차례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지만 대원군은 끝까지 쇄국을 고집했던 것이다. 환재공은 갈수록 천장을 쳐다보며 탄식하는 날이 늘어갔다.

"이 나라가 망해가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가련한 우리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늘로부터 버려져야 한단 말인가?“

 


결국 환재공은 1874(고종11) 9월에 사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세상만 한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환재공은 똑똑하고 젊은 양반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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