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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공 박응남묘비(朴應男墓碑) 해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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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00 조회2,4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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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응남묘표(朴應男墓表)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兼)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경연의금부사(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시문정박공묘표(諡文貞朴公墓表) 음기

                
                 남일공 박응남묘비(朴應男墓碑) 해석문

    유명조선대사헌(有明朝鮮大司憲) 증이조판서9贈吏曹判書) 시문정(諡文貞) 박공(朴公) 응남지묘(應男之墓)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 부좌(祔左)
                    
    아! 여기 광주군 치소 서쪽의 의곡리에 유좌 묘향의 언덕이 있으니, 바로 남일선생 박공이 묻힌 곳이다. 공의 휘는 응남이요, 자는 유중(柔仲)이며, 다른 호는 퇴암(退菴)으로 나주 반남현 사람이다.
    공의 7대조인 반남선생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은 고려 말에 직간하다가 죽었고, 증조인 임종(林宗)은 상주목사를 지냈다. 조부인 조년(兆年)은 이조정랑을 지냈고, 아버지는 야천선생인 문강공(文康公) 소(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우리 반남박씨는 고관을 많이 배출한 대족인데 세상에서 칭송하기는 유학의 연원에 있어 명성과 덕망이 뛰어난 인물들을 계승시킨 점에 있다고들 한다.
    공이 본조에서 벼슬한 것은 명종, 선조 2대에 해당하는데 그가 대사간으로 있을 적에 이량(李樑) 등의 여러 간신들을 탄핵 · 제거하고 선량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명종 말기의 치세를 연 것은 저 주역의 왕정에서 소인의 악을 드러낸다는 뜻을 깊이 체득한 것이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어린 나이로 대통을 이음에 미처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는데 그 때에 공은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예로써 허물없이 보좌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성군이 출현하였음을 흔쾌히 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한 마음을 다해 성의껏 인도하고 일에 따라서 간쟁하여 기필코 임금을 요와 순처럼 되게 하고 세상을 태평성대가 되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유풍이 발흥하고 선정이 크게 행해졌으므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하는 자들이 선조 초기에 행한 정치가 우리 왕조에서 제일 훌륭했다고 칭송하니, 아! 공이 국가에 공적이 있음이 크지 않은가?
    공은 충성스럽고 강개하여 정도를 고수하고 굽히지 않았으므로 잘못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숨김이 없었다. 명종이 승하하여 이미 발인은 하였으나 인산 날짜는 아직 멀었을 적에 종관으로 하여금 환도했다가 정해진 기일이 되면 다시 오게 할 것을 논의하자, 공은 그 일이 타당하지 않음을 논하고서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하는 의도가 격렬하여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 우제를 거행할 때에 막사를 설치하여 잠시 쉬게 하는 것은 부당함을 말하면서 “이는 본디 옥체가 고단하여 상할까 염려해서이기는 하나 제향의 일은 중대한 것이니 구차하거나 소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즉위 초에는 더욱 한결같이 예제를 따라서 민심을 감복시켜야 합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 말을 따랐다.
    과거 해안에 설치한 보루에서 선박 한 척을 나포하고 타고 있던 자를 해적으로 의심하여 죽였으나, 나중에 그와 같이 왔던 자를 포획하고는 비로소 그가 중국인이지 해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옥을 담당하고 있던 관리는 오히려 나중에 포획한 자도 죽이자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이 앞서 있었던 일을 문책할까봐 걱정해서였다. 공은 그것이 대국을 섬기는 의리가 아님을 극렬하게 말하고 또 “일 처리가 이와 같다면 또한 아래 사람들이 전하를 속이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가 의리를 진언할 적의 엄격함과 임금을 존경함의 지극함은 대체로 늠름하며 조금도 고식적인 사랑이 없었으니, 앞의 몇 가지 일을 미루어 보면 그 밖의 일을 가늠할 수 있다.
    공이 일찍이 종자(從子)에게 얘기하기를, “우러러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를 굽어 인사를 살펴보매 머지않아 대란(大亂)을 당할 터인데 나는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난리를 초래할 만한 조짐이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근원을 막아야 되는데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죽음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자 종자가 묻기를, “일이 정말 이에 이른다면 대인께서 어찌 홀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옛 사람 중에는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친 자도 있었고 말 한 마디로 백만의 병력을 물리친 자도 있었으니, 이것은 단지 나의 성심이 어떤가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동서의 틈이 벌어지자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은 매번 이를 통탄하며 공이 살아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임진년(선조 25, 1592년)의 왜란 때에 송강(松江) 정철(鄭澈)도 공이 했던 말을 추념하면서 공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애통하다는 말을 아주 극진하게 하였다.
    공은 행동이 준엄하고 의론이 정대하여 삼사(三司)에 있으면서 임금을 발분시키고 잘못을 지적할 적에는 회피하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옛적에 칭송한 바 급암의 곧음도 대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이른바 “단지 나의 성심이 어떤가를 돌아본다.”라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또한 범문정(范文正), 한충헌(韓忠獻) 두 공의 규모와 합치되고, 요컨대 제갈(諸葛) 충무후(忠武候)가 성패와 이둔은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이 공다운 까닭은 그 근본과 강령이 진실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니, 아! 또한 훌륭하도다.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서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과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으며, 사귄 벗들은 사암(思菴) 박순朴淳),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과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 등이다.
존재 기대승이 일찍이 사암 박순에게 이르기를, “우리 친구 중에 유중만이 책을 읽어 터득한 바가 많다.”고 하였으며, 또 “유중만이 학업을 도울 만하다.”라고 말했었다.
    공은 천성이 엄정하여 의롭지 않은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곧 선을 행하는 길을 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옳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친하고 사귄 지가 오래된 상대라 할지라도 반드시 통렬하게 배척하였고 농담을 던지며 검속함이 없는 사람과는 번번이 자리를 옮겨 말도 주고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있을 적에 행한 언론도 한결같이 옳은 것만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뭇 사람들의 감정이 세상에 들끓었으며, 공이 죽은 후에 어떤 이들은 벼슬에 나갈 채비를 하면서 서로 경하하기까지 하였다.
율곡(栗谷)선생 이이(李珥)의『일록』에 공을 일컫기를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우직하여 무슨 말을 할 적에 서슴없었고 남을 공격함에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말이니, 진실로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면서 공의 사심 없는 충정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공은 반드시 원한을 품은 자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화가 뒤따랐을 것이나, 선조(宣祖)가 일찍이 공의 사직을 청원하는 상소문에 비답하기를, “천성이 정직해서 진실로 헌장의 직책에 알맞다.”라고 한 분부가 있었으니 임금에게 입은 예우의 융숭함이 이와 같은 적이 있었으며, 사암 박순도 또한 일찍이 공을 일컬어, “충성스런 마음과 결백한 태도로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국가가 의지해서 기둥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그가 세상의 도를 붙들어 유지시키고 사림을 배양하여 국가의 명맥을 무궁토록 장구하게 한 까닭이니, 공이 살았던 시대를 논하는 자들이 어찌 이 점에 느낀 바가 없겠는가?
    공은 가정 정해년(중종 22, 1527년)에 출생하였고, 임자년(명종7, 1552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그 후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이조의 좌랑과 정랑, 의정부의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고, 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다음 직제학을 거쳐 승정원 승지로 승진하였다.
    이 때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이를 때까지 누차 삼사(三司)와 은대(銀臺)의 장으로 있었고, 헌장(憲長)은 재임한 횟수가 열 번이 넘었으며, 육조에 있어서는 참의로 재임한 곳도 참판으로 재임한 곳도 있다. 그 사이에 다른 직책을 맡은 것이 있으나 모두 적지 않는다.
    융경 임신년(선조5, 157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이고, 금상 임자년에 경연하는 신하 중에 공의 학술이 깊고 도가 곧았음을 임금에게 아뢴 자가 있어서 특명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공의 아내인 정부인은 파평 윤씨로 별제를 지낸 화(和)의 딸로서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인 동도(東燾)는 군수를 지냈고, 차남은 동휴(東烋)이며, 막내 아들 동점(東點)은 현감을 지냈다. 두 딸은 부사를 지낸 이암(李巖)과 부사 이정간(李挺幹)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인 해(垓)는 호군을 지냈고, 증손자인 세면(世冕)은 첨추를 지냈으며, 현손인 태정(泰定)은 금창부위(錦昌副尉)를 지냈고, 5대손인 필명(弼明)은 대사헌을 지냈다. 대사헌의 아들인 사수(師洙)는 현재 황해감사이다.
    아! 이제는 공이 작고한 지 1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공이 남긴 풍도와 공적은 숙연히 아직도 생기가 남아 있다. 생각하건대 공은 선을 추구하는 아들로써 한 몸의 이해를 돌아보지 않는 신하가 되어 거리낌 없이 직언을 하였으니 국가가 그에게 힘입은 바가 있다.     근세의 인물 중에 구할진대 실로 공과 견줄 만한 자가 적으나 다시 여러 임금을 지나서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칭찬하고 추증하는 은전이 거행되었으니 아! 어찌 기다린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에 해백(海伯)군이 공의 묘표에 쓸 음기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돌아보건대 내 어찌 감히 감당할까마는 나 필주(弼周)는 공의 아우인 졸헌공(拙軒公)의 5대손으로 이 일이 아니면 평생 동안 공의 인품을 사모하여 우러러 본 것을 나타낼 방도가 없으므로 이에 삼가 종조부인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가 찬한 공의 행장을 토대로 중요한 점을 추려 모아 오른쪽과 같이 짓고서 후세의 운손을 기다리노라.

    종후손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집의 겸세자시강원진선 박필주(朴弼周) 찬
    비석의 전면은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모았고, 뒷면은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모았다.
    숭정갑신후 90년인 계축년(영조9, 1733년) 5월 일 새김

※ 이 글에서 말하는
     종자(從子, 조카)는 活塘公 諱 동현(東賢)이고,
     해백(海伯,황해감사)은 文憲公 諱 사수(師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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