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공 박동량신도비(朴東亮神道碑) 해석문
페이지 정보
박종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08 조회1,915회 댓글1건본문


박동량신도비
행우참찬 금계군 증영의정 시충익 박공신도비명
유명조선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선공신 숭록대부 행의정부우참찬 겸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금계군 증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금계부원군 시오창 박공신도비명-서문을 겸하여
숭정 년간의 을해년 2월 5일에 고 판부사 오창 박공이 작고했는데, 나는 초야에 묻혀 살고 병도 나서 능히 달려가 조곡하지 못하고 만시로써 마지막 길을 보내며 애도하였다. 이미 발인하고 나서 그의 아들 도위군 미가 동양 신석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을 부탁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선친의 친구 반열이기 때문이다.
공이 귀양가 있을 때 친구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스스로 자신의 사적을 서술하고, 또 말하기를, “한 두 사람과 나의 형제는 능히 그 뜻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서신을 읽고 마음속으로 남몰래 민망히 여겼는데 답장을 하지 못하였다. 공이 지금 세상을 떠났지만 생시의 부탁을 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상고하건대 공의 이름은 동량이고 자는 자룡이며 자호는 오창이다. 만년에 분진의 봉성에 우거하였으므로 또한 호를 봉주라고도 한다. 박씨는 실로 신라의 국조로 후세에 자손들이 분파하였는데 나주의 반남으로 이사한 분이 공의 선조이다.
고려 때 판전교시사인 상충은 바른 말을 하다가 죽었는데 역사책에 전기가 있다. 소생인 은(訔)은 우리 태종을 돕고 지위는 좌의정·금천부원군에 이르렀으며, 두 대를 내려와서 상주목사를 지낸 임종(林宗)이 있다. 목사는 이조정랑을 지낸 조년(兆年)을 낳았으며, 정랑은 사간을 지낸 소(紹)를 낳고, 사간은 대사헌을 지낸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공은 바로 대사헌공의 넷째 아들이다.
박씨는 본래 귀족인데 공의 숙부인 반성부원군 응순(應順)에 이르러서 포은으로 사간공은 영의정에, 정랑공은 좌찬성에, 목사공은 이조판서에 추증되니, 이로 말미암아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의정공은 기묘사림을 중히 여겼고 다섯 명의 아들은 모두 재주와 행실로 현달하였으며, 공의 형제나 종형제에 이르러서도 화려한 벼슬을 지내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공의 자손은 그 재주가 이러한 관직에 거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런 이가 없음은 왕후의 친척이라고 꺼려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은 박씨 집안에 어진 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이 1품에 오르자 대헌공은 영의정에 반천부원군으로, 모친 임씨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부인의 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구령인데, 석천선생인 억령의 아우이다.
융경 기사년 7월 24일에 출생하였는데, 공은 사람됨이 마치 대장간에서 금방 만들어져 나온 칼과 같아서 어려서부터 그 날카로운 면을 드러내 보였으니, 서너 살 때는 책을 받아들자마자 금방 글 뜻을 깨달았다. 또 아홉 살 때 할머니의 처소에서 시중들 적에 밤이 되어 폭우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요란하자 공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앉았다. 할머니가 괴상하게 여기어, “아가! 어찌 혼자 앉아 있느냐.”하니, “뇌성벽력이 있을 때엔 반드시 얼굴빛이 변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할머니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겼다. 점차 성장해가면서 명성이 자자하고 동료들보다 앞서 나아갔다.
열일곱 살에 여흥 민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생관에 머무는 날에도 반드시 부모를 찾아가 뵈었고, 물러 나와서는 여러 동료들과 즐겁게 놀면서 온갖 잡극도 함께 펼쳤다. 돌아오면 책을 읽되 야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 것으로 일정한 규칙을 삼았으니, 동료들은 실로 그가 공부에 이처럼 열중한 줄을 알지 못하여 글을 지을 때 공의 문장력이 발휘됨을 보고는 모두들 공은 신의 도움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공은 기축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는 문과에서 병과로 뽑힌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올랐다. 추천으로 사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고 대교와 봉교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강연하는 자리에서 기주할 때 민첩하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당시에 찬사를 받았다.
마침 인재를 새로 추천할 때가 되자 공은 부귀에 급급하는 세도가의 자제들은 모두 물리치고는,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선비들의 거망을 업고 능히 그 직책을 맡을만한 자를 추천하였다가 세도가의 비위를 크게 건드려서 파직되었다.
임진년에 전례에 따라 호조좌랑으로 추천되었다. 호조는 문서가 집중되는 곳으로 이름이 나서, 일에 단련된 관리도 더러 격무를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전들은 공이 호조좌랑으로 제수된 사령장을 보고는 몰래 얕잡아보았는데, 공이 문서를 손수 열람하며 한번 훑어보고도 빠뜨린 것이 없자, 노숙한 이서들도 크게 놀라 혀를 내둘렀다.
병조로 옮겨가서 마정을 주관하였는데, 그 일을 맡은 지 오래지 않아 왜에 대한 보고가 급박해지자 장졸들이 전투에 사용할 말과 짐 가운데 공에게서 공급받아야 할 것이 한 달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도 넉넉한 듯하였고, 서행하는 날에 이르러서도 말은 오히려 사천여 필이나 되었다.
공은 어가를 따라 밤에 임진강에 이르렀는데, 호위하는 군졸들이 낮에 달아나 임금께서는 혼자 배 안에 앉아 있었다. 공은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직접 사람들을 불러 모아 육십여 명을 얻어서 어가가 비로소 떠날 수 있었다. 송도에 머무를 때는 장관과 함께 문 앞에서 숙직하기도 하였다.
군인들이 밤에 소란을 피자, 장관은 당황하여 무슨 영문인지 살피지도 못하고 또 문을 밀치고 나가려 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알고서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자 안정되었다. 장관은 본래 공을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그의 담력을 칭찬하였고, 일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박랑박랑’하며 찾았다. 또 비변사 낭관을 겸임하여 기밀에 관한 일을 미리 듣곤 하였다.
어가가 평양에 머무른 지 한 달이 넘자 백성들은 믿고 안심하였으며, 외지에 살던 자들도 가산을 옮겨 성으로 들어왔다. 임진강을 지키던 군사들이 무너지고 적이 패강으로 들이닥치자 조정에서는 임금의 어가를 옮기기로 논의하였고 신하들은 대부분 함흥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는데, 유독 우상인 윤두수와 공, 그리고 이유징만은 평양을 지키자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어가가 떠나기 위해 차비를 한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는 길을 가로 막고 크게 소리치며 험한 말을 마구 해댔다. 사람들은 그들이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이 급히 계책을 아뢰어 시행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물러갔다.
영변에 이르자 세자에게 감무하도록 명하고는 왕은 요하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어가를 따르던 조신들이 연달아 도망가서 왕을 따르는 자는 십여 명에 불과하였고, 낭서에 있는 자도 겨우 공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육조·비국·춘추·내승의 모든 업무가 공에게 맡겨졌으므로 공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힘을 기울이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매번 위험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번번이 창 앞에 맞서고 몸으로 어가를 호위하니, 왕은 마음속으로 공을 대견하게 여겼다.
대헌공은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으므로 분조에 속하였는데, 도중에 병이 위중하자 공은 머물면서 병을 돌보게 해줄 것을 진정하여 이미 왕의 허락도 받았으나, 대헌공이 상소하여 “신이 이미 어가를 따르지 못하는데 차마 또 신의 자식으로 하여금 아비를 우선하고 임금을 뒤로 돌리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측은하게 여겼다.
공은 결국 어가를 따라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조좌랑·지제교에 임명되고 얼마 안 있어 정랑에 올랐다. 이때 중요하고 비밀스런 정무가 더욱 많아서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모두 허둥지둥하는데 공이 그 사이를 오가며 재기를 발산하는 것이 통쾌하였으므로 재상이 그의 계책을 훌륭하게 여겨서 시행한 바가 많았다.
얼마 후에 조정 관원들이 점점 모여들었는데, 지난번에 정도를 싫어하던 자들이 직책에서 파면되지 않자 스스로 깨끗하지 못한 근본을 드러내었다. 이에 시비를 가리기 위한 의논이 크게 진행되었는데, 공은 오로지 한 마음으로 피차를 조종하기에 힘써서 살피고 헤아림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므로, 노성한 사람들이 세도의 책무로써 다투어 권면하였다.
공은 중국말을 잘하여서 언제나 중국 관리를 접견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의 앞에 있다가 의견을 물을 때면 나아가 자세하게 대답하니, 중국 사람들도 눈여겨보지 않음이 없었고, 임금 또한 재주를 지녔다고 여겼다.
계사년 10월 임금이 돌아와 해주에 머물 때 단계를 넘어 동부승지에 제수되니, 공은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자리를 옮겨 좌승지에 이르렀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이듬해에 승진하여 도승지에 오르니 이때 공의 나이 26세였다. 공은 더욱 황공하여 누차 소를 올려서 사면을 얻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당시의 장관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끌어다가 비변사 부제조로 삼았는데, 대개 그 자리를 만들어서 공을 대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은 옳지 않은 바가 있다 하여 극력 사양하였다. 겨울에 중국 북경에 가서 동지 절기를 하례하였다.
정유년에 왜란이 다시 급박해지자 왕비와 후궁을 받들고 나아가 수안에 머물렀다. 주현이 쇠잔하고 피폐하여 일이 안정되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공의 힘에 힘입어 구제되었다. 얼마 안 가서 도승지로 소환되었다.
경리 양호가 임금께서 제천에 주둔하며 응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응원할 제천은 왜의 진영과 거리가 실로 멀지 않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그대로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적진에 다다를 것이다.”라고 하니, 따르는 신하로서 선발된 자들은 모두 머뭇거리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공은 앞서 외직에 나가 있었으므로 선발되지 않았으나 상소하여 따르기를 청하였는데 마침내 임금께서 가지 않았다.
공이 관직을 내놓고 어버이를 봉양하러 돌아가니,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주어 그의 귀향길을 빛나게 하였다. 봉양을 위하여 연안부사의 자리를 얻었으나 몇 달 만에 대헌공의 상을 당하였고, 의인왕후의 상이 나자 달려가 조곡하고 돌아왔다. 복을 마치자 호군을 제수받았는데, 산릉이 오랜 동안 결정되지 않자 상소하여 요사스런 말들을 논파하고 드디어 점쳐서 길지를 얻었다.
임금께서 경기관찰사에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병이 위중하자 임금께서는 그를 염려하여 의진과 약물은 대신을 예우하는 수와 견줄 정도였고, 다른 은혜로운 하사품 또한 증가하였다.
공은 전문을 올려서 감사를 표하고는, 곧이어 외직에 보임하여 병을 다스리고 모친을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걸하였는데, 사연이 간절하였으므로 임금께서는 그를 어질게 여기고 감탄하여 손수 서찰을 써서 훌륭하다고 답하였으나, 외직으로 보임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조서를 받든 사신인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는데, 접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들이 있는 곳마다 힘이 달렸다. 임금은 경기 고을이 더욱 피폐하고 척박해졌으므로 곧 공을 기용하여 재차 경기관찰사에 제수하였는데, 일을 처리하는 데에 솜씨가 있었으므로 두 사신이 마침내 배불리 먹고 싸가지고 돌아갔는데도 백성들도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병으로 경기관찰사를 사직하였으나 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강원도의 업무는 여가가 많은지라 관할 구역을 순행하며 지날 때에는 명승지들을 찾아다녔고 친구와 가난한 선비를 만나서는 술 마시고 시를 읊는 데 전념할 뿐, 그 나머지는 터럭만큼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영월에 가서는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곳이 황폐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 아파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오자 근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있었으니, 공이 실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임진년에 있었던 모든 신하의 공로를 기록할 때 공이 건의하기를 “다같이 사직을 위해 싸웠는데, 방패와 창을 가진 자나 말고삐를 잡은 자는 나아가 그 사이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땅히 무공 세운 사람들을 많이 녹훈하여 군사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공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권세 있는 재상이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원종공신을 정하였으므로 많이 넘치고 모멸감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는데, 공은 제조로써 그 일을 주관하면서 일체 기록을 살피고 행적에 의거하니, 굴욕을 당한 자 또한 스스로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은 2등에 책정되고 호성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품계를 뛰어넘어서 금계군에 봉해졌다.
공은 양전·탁지·춘관·추관에서 참의가 된 것이 혹 두세 번이나 되었고 대사성·대사헌·정부참찬은 각각 한 번씩이었으며, 경연·관각·금오·총관·승문의 제조 또한 여러 번 겸임하였는데 모두 오래 하지는 않았다. 호조판서로 옮겨 임명되었다. 공은 항상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묵은 폐단을 크게 고치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제야 호조 참판 등과 더불어 그에 대한 것을 강구하였다.
얼마 안 가서 외직으로 나아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넓은 길이건만 배와 마차가 뒤엉키고 관할 구역에는 처리할 문서가 많이 쌓였으며, 변방이라 오랑캐가 쉽사리 소동을 일으키고 민간의 습속이 소송을 즐기고 뇌물 바치기를 잘하였으므로 위정자들이 이를 근심하고 있었다. 공은 격무에 능하였으므로 쌓인 안건이 씻은 듯이 처리되었고, 양편이 다투는 송사에서는 혀를 더럽힌 적이 없었다. 여가로 유학을 일으키고 무예를 가르쳤으며, 기물 등을 널리 비축하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묻고 다녔으며, 몸소 험난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빙성을 설치하여 겨울철 방어의 모든 어려움을 해소하였는데, 이런 일을 두루 거행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한 번 움직이듯 쉽게 하였다. 그리고 손님을 맞거나 술자리에 이르러서는 풍류가 간간히 발휘되었고 친구들을 접대할 때는 소원한 자와 친한 자를 알맞게 대하였으므로 인정이 넘쳐났다.
사나운 아전으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내쫒고 채수의 탐욕스럽고 방자한 정상을 파헤쳐 내쳤는데, 채수는 권세 있는 재상을 기쁘게도 성내게도 할 수 있는 자요, 사나운 아전은 바로 공의 조카와 가장 친한 자였으므로 사람들이 특히 어렵게 여겼었다.
임부인은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그는 셋째아들의 임지인 신천에서 둘째 아들을 따라 황주로 옮겼는데 오갈 때의 차림이 휘황찬란하였다. 공도 또한 평양에서 맞이하였는데 조석으로 채비하여 봉양하였고, 강호의 누관 가운데 경치 좋은 곳을 골라서 수연을 베풀어 드렸는데, 이 때에 자손 형제들이 좌우에서 즐겁게 모셨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임기가 차자 원봉으로 집에 돌아왔다. 선조의 상이 나자 공을 수릉관으로 삼았는데, 그해 겨울 임부인이 돌아가시자 공은 부음 소식을 받고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처분을 기다렸다. 관직 교체에 대한 허락을 듣고는 곧 상차로 달려갔는데 오래지 않아 돌아오기를 재촉하는 조정의 교지를 받들었다.
장청 설치의 명이 마침 내려져 있었다. 선조는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공을 대하기를 부자지간처럼 하였고 공 또한 감격스러움을 뼈 속까지 새겼으니, 자연 국상을 치루면서도 마치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다. 또 노모를 그리워하여 근심이 가슴에 맺혀 있었는데 두 번의 상을 당하자 모습이 초췌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 은례로써 세 품계를 승진하였고, 국상이 끝나자 돌아가 집에서 머물렀다. 신해년에 지방관이 됨과 동시에 원봉을 회복하고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몰래 서로 부르고 화답하며 자신들이 임금을 도운 공이 있다 하면서 제멋대로 굴고 방자하였다. 정인홍이 와서는 도를 어지럽히고 어진 사람을 비방하였는데, 그 말들은 대개가 욕설이었다. 공이 소를 올려 배척하는 데 매우 힘썼더니만, 간사한 무리들이 앙심을 품고 다투어 중상모략하려고 하였다.
마침 봉산군수 신율이 급변을 알렸다. 신율은 본시 소인으로서 모든 간인에게 통지하였으니, 그 의도는 화를 얽어서 정권을 훔치려는데 있었으므로 떠돌아다니는 형편없는 걸인을 포박해다가 심하게 형벌을 가하여 모역을 했다고 말하도록 강제로 자복시켰다. 광해군이 친히 임어하여 신문하였는데 공은 추관으로 들어가 앉았다가 그 공초의 진술이 맞지 않는 것을 때맞춰 대신이 문초할 기회를 이용하여 빠짐없이 말하니 이이첨 등이 곁에서 눈을 흘겼다. 다음날 광해군이 하교하여 박모는 역적을 두둔하려 한다면서 판의금의 직위에서 내치니, 언관들이 상전의 바람에 부응하여 끌어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단지 작위만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가 오랜 뒤에 서용하여 원봉을 회복시켰다.
계축년 여름에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났다. 그에 연루된 서양갑·정협 등은 일맥이 상통한 자들로 모두 이이첨 무리의 꾐과 위협에 빠져서 말을 하여 임금의 장인인 김제남을 가리켜 주모자라고 하고, 연이어 일곱 신하에게도 미쳤으며 종국에는 영창대군 의에게까지 돌아갔는데, 의는 이 때 나이 겨우 7세였다. 애당초 선조가 병으로 눕게 되자, 의가 부득이하게 훗날 온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손수 유교를 써서 광해에게 동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도록 부탁하였다. 또 공경 가운데 7인에게도 부탁하였는데 공도 7인 속에 끼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자 이이첨 등은 거짓 교지라고 지적하고 그의 무리들로 하여금 7신을 논죄하게 하였으나 즉시 판명되지 않자, 사판에서 빼버리자고 청할 따름이었다.
정협의 모함 또한 매우 광범위하여 선대 조정의 재신과 명사로써 모면한 자가 거의 없었는데, 공도 여러 공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일이 밝혀지자 곧 석방되었다. 처음에 공이 옥사를 치르면서 질문에 따라 변명하였는데 임금의 장인과 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자연히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다른 연관성이 없었다. 그 후 궁중에서 있었던 무고의 일이 발각되자 간신들은 이 일단을 가져다가 기록하여 증빙을 삼았고, 평소 공을 해치려던 자들 또한 때를 틈타 덩달아서 마침내 부회하여 죄안을 작성하였다. 일이 위로 장추궁에 파급되고 그 화가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살피지 않고 공을 심하게 헐뜯었는데, 유독 백사 이항복과 현헌 신흠만은 마음속으로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대개 십여 년 동안은 이를 밝히려는 자가 없었다.
병진년에 이이첨 등이 의논하여 폐모할 것을 결정하면서, 다시 7신을 죄에 얽어매어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기로 청하였는데, 단지 중도에 정배되었다가 6년만에 풀려 전리로 돌아왔다.
지금의 임금이 반정하자, 의논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이미 지난 일을 책잡되 그 실상을 다시 규명하지 않고 떠들썩하니 부화뇌동하여 기필코 그를 귀양 보내고야 끝냈다. 여러 대신이 금오위에 있는 옛 문서를 구하여 공을 심리한 서류를 보더니만 서로 말하기를 “살펴보니 이러할진대 이것이 무슨 죄인가.”하였다. 이에 수상 이원익 및 정엽·이귀가 그를 위하여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모두 보고하였는데, 혹자는 “지난 일은 이러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공은 태연히 출발하며 집 안 사람에게 경계하여 사후의 일을 대비하게 하였다. 5년 동안 강진에 있을 때는 바깥문을 나가지 않았다. 정묘년에 부안으로 양이되고, 또 6년만에 내지에 있는 충원으로 옮겨졌다가 2년 후에 사면을 받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서호 위에 집을 사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공은 본디 강건하여 질병이 없었으며 날마다 친지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았는데, 하루저녁에 갑자기 담이 올라와서 그날 밤으로 돌아가셨으니 춘추 67세이다.
공이 이미 돌아가자 아들들이 글을 올려 억울함을 하소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물었다. 영의정 오윤겸 등 네 사람이 의논하여 모두가 “실로 그 글의 내용과 같다.”고 하자, 이에 예전처럼 작위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보통 키에 얼굴색이 검고 수염이 뺨을 덮었으며, 눈빛이 반짝거려 능히 이십리 밖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분변하였고, 성품이 솔직하여 때로는 유가의 예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가정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고, 형제간에는 서로 지기가 되어 말을 하매 거역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 분가하여서도 언제나 큰 형수와 큰 누이의 말을 잘 들었다. 벼슬을 하고 훈신귀족이 되었지만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향리 사람과 친척들은 그를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다고 칭찬하였다.
남과 같이 있을 때에는 격의 없이 대하고 흉중에 조금도 숨기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드러낸다.”고 하자, “남을 대할 때 의심과 비난을 앞세우는 것은 내 자신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궁한 사람을 동정하고 곤란한 사람을 돕되 귀천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몰려와 얘기하고 웃는 소리가 자리에 넘쳤는데, 서로 대하면서 형색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그가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공무를 받들 때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사사로운 정에 흔들린 적이 없었고, 일을 당하여 감정이 북받칠 때에는 곧장 밀고 나아가지 피하지 않았다. 비록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중일지라도 조정에서 한 차례의 선정을 행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희색이 만면하였고, 시의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종일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평생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 없이 오직 술만을 즐겨 마셨는데 취하는 지경엔 이르지 않았다. 오랜 동안 용만에 있을 때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즐비하였으나, 문 닫고 들어앉아서 자신을 지키기를 마치 처자처럼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지조와 행실을 존중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때에는 몇 줄씩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며, 또 기억력이 좋았으나 그 장점을 자부하는 일은 도의상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한가하게 지내게 된 이후로는 자못 서적을 가까이하였는데 흥이 나면 아무데나 훌훌 나는 듯이 붓을 휘둘렀지만 그 집에서는 뭐라 비난하지 않았다. 산수·사주·사어 등 모든 기예에 두루 통하여 그 절묘한 이치를 얻었으며, 또한 익히지 않고도 능한 것이 있었다. 저술한 것은 이리저리 흩어져 유고 두 권만이 집안에 남아 있다.
공은 나이 이십 전후에 영명을 멀리 드날리고 재주를 스스로 드러내었으며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는 충성심을 더욱 발휘하였으므로 국가가 중흥되었다. 공은 공신이 되어 인각에 초상이 그려지고 검은 모발이 변하지 않았으니, 아! 거룩하도다. 그런데 화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몸은 다시 파리해지고, 몽둥이질이 멈추지 않았으며 집요하게 참언이 만들어졌다. 세상의 운은 거듭 형통하거늘 갈 길이 더욱 험난하여 복관을 앞에 둔 채 한을 머금고 영면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부인은 승지를 지낸 민선의 딸이요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의 외손으로 공보다 한 살이 적다. 규중에 있을 땐 사녀로 칭찬받고 시집와서는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도위가 일찍이 병을 앓을 때 찾아가서 뵈었는데, 이때 문병 온 친구들이 많은 것을 보고는 기뻐해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의빈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집 안에 들어박혀 처자처럼 해야 하거늘 이 아이가 그렇지 않으니 내가 들은 바와는 다르다.”하였으니 그의 높은 식견과 원대한 사려는 거개 이와 같았다.
을축년 5월 공을 따라 강진의 적소에 있다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공은 부인과 더불어 처음에는 파주의 남쪽에 묘를 썼다가 숭정 신사년 10월 19일에 안산군 서령산 묘향의 언덕으로 옮겨 마침내 합장하였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도위로서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양위’에 봉해졌고, 둘째 아들은 의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에 올랐으며, 셋째 아들 유는 문학과 덕행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넷째 아들은 자이다. 사위는 대사성을 지낸 이명한과 참봉 홍처심, 진사인 유성오이다. 금양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세교이고, 이명한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수찬을 지낸 일상과 진사인 가상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의는 2남 1녀, 홍처심은 2남 2녀, 유성오는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이고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은 표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근세에 사림이 의지한 인물로는 오리 이공·백사 이공·현헌 신공·추탄 오공·수몽 정공 같은 이들이 있을 뿐이니, 이들은 사사로운 정에 의지하여 공론을 폐하지 않은 인물임이 분명하다. 공을 비방하는 말이 남기처럼 일어났으나 공이 스스로 변명하지 못한 것을 이들이 변명하였다. ‘뭇 사람이 헐뜯는 바는 군자의 완전한 바다.’는 그 말은 족히 징빙할 만하니, 후세에도 길이 볼지어다.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동지경연사 지춘추관 성균관 세자좌빈객 김상헌은 찬함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중추부사 겸영경연사 세자부 송시열 씀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빈객 민유중 전자를 씀
사간공(司諫公) ; 문강공(文康公) 휘 박소
정랑공(正郞公) : 휘 박조년
목사공(牧使公) ; 휘 박임종
양전(兩銓) ; 조선시대 이조와 병조를 합하여 부른 이름
양전이라고도 하였다. 동반(東班:문관)의 전형(銓衡)을 맡아본 이조를 동전(東銓)이라고도 하고, 서반(西班:무관)의 전형을 맡아보던 병조를 서전(西銓)이라고도 했는데, 관리의 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양조(兩曹)를 전조라 하였다.
또한 양조의 관원을 전관(銓官), 참판(參判)을 아전(亞銓), 정랑(正郞)·좌랑(佐郞)을 전랑(銓郞)이라 하였다
탁지(度支) ; 호조
춘관(春官) : 예조
추관(秋官) ; 형조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 또는 그자리
금오(金吾) ; 의금부·
총관(摠管) ; 왕과 왕궁을 호위하는 책임자
도위(都尉) ; 의빈부
오리 이공 ; 이원익
백사 이공 ; 이항복
현헌 신공 ; 신흠
추탄 오공 ; 오윤겸
수몽 정공 ; 정엽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 유조인의 문인(박동망.박동량)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성)․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미(미27)와 의(의16)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상헌(尙憲)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기재잡기 寄齋雜記》․《방일유고 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선조25 6/25 박동량(朴東亮)을 병조 좌랑으로 삼았다.
6/29 호종한 재신들에게 추가로 상가(賞加)를 내렸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
에게는 선무(宣務)를, 가자(加資)하였다.
7/13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좌랑에,
8/20 박응복(朴應福)을 대사간에,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10/20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정랑에 제수하였다.
26 9/01 이조 정랑(吏曹正郞) 박동량(朴東亮)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공이 있다
하여 특별히 승정원 승지에 제수했다.【박동량은 젊은 나이로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용모와 행동 거지는 오히려 동자(童子)다운 기색이 있었다.】
9/19 우부승지 박동량(朴東亮)이 입시하였는데,
10/18 좌부승지 박동량(朴東亮)
11/21 우승지(右承旨) 박동량(朴東亮), 검열(檢閱)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했다.
11/03 승지(承旨) 박동량(朴東亮)이 아뢰기를,
11/12 중국 사신이 칙서를 받들고 잇따라 이르니, 상이 뜰에서 무릎꿇고 맞이하여 사배(四拜)하였다. 사배가 끝나자 사신이 칙서를 펴고 승지(承旨) 박동량(朴東亮)이 칙서를 읽었다.
12/17 박동량(朴東亮)을 우승지에,
12/20 우승지 박동량이 우리 나라 사정을 중국에게 알릴 방법을 진달하다 》 우승지 박동량(朴東亮)이 의논드렸다.
댓글목록
允中님의 댓글
![]() |
|
|---|---|
| 작성일 |
청음집 제24권 / 비명(碑銘)
금계군(錦溪君) 겸 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박공 동량(朴公東亮)의 신도비명 병서
錦溪君兼判義禁府事朴公神道碑銘 幷序
제목이 이상하다 했더니 글쓴이가 원본에 없는 내용을 임의로 만들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