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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신주 매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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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1-11 13:55 조회1,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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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신주(神主) 매안(埋安) 기록

문정공(휘 尙衷)의 아드님이신 평도공(휘 訔)께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장손이신 참판공(휘 葵)마저 마흔도 채 안 된 연세에 돌아가신 후, 증손 병(秉)자 4형제분 중 둘째(휘 秉鈞)와 넷째(휘 秉德)는 어린 자녀들을 남기시고 요절(夭折)하셨으며, 첫째(휘 秉文)와 셋째(휘 秉中) 역시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하여 가세가 심하게 기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후손들이 문정공의 묘소조차 잃어버리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던 듯합니다. 즉 문정공께서 1375년(우왕 원년) 세상을 떠나신 후, 공(公)을 부인(한산이씨)과 같이 개성부 동쪽의 송림현(松林縣) 제비원(齊飛原)에 장사지냈는데 세월이 흐르고, 장손 참판공께서 일찍 별세하신 뒤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후손들이 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조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초(初)에 어떤 이가 장지(葬地)를 구하다가 수풀 속에서 우연히 문정공 묘소의 표석을 발견하여 묘소의 위치가 당시 공의 후손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은 공의 6대손 소고공(휘 承任)께서 지으신 공의 비문(碑文)에 기록되어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비문의 관련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은 생략하고 해당 부분의 번역문만 옮깁니다.

. . . . . 묘소는 세월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자손들에게 실전되어 그 지점이 확실하지 않으니 온 문중이 애통해서 혼령이 의지하는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오래도록 묻지 못하여 또한 처리하기 어려운 의안이 되었다 . . . . . . 지난 해 여름 4월에 동부 쌍백정 종가에 모여 제사를 지낸 뒤 사당의 신주를 모시고 홍제원에 와서 하직하였다신주 수레를 모시고 간 자가 세 사람이었는데, 이틀 뒤 모갑(某甲)에 도착했다. . . . . . 제사 지내어 편안히 모시고 돌아와서 문중에 고하니 . . . . . . 찬의 세현(世賢)ㆍ사직 세검(世儉)ㆍ호군 세칙(世則)은 신주를 모시고 묘소에 와서 공사가 끝나도록 감독하였다.(출처: 반남박씨세보 세적편)

위의 기록으로 판단하건대, 공의 묘소를 잃어버린 후손들이 공의 신주를 사당(가묘)에 모신 채 친진(親盡)에도 불구하고 신주를 매안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선조 영령(英靈)의 음우(陰佑)로 공의 묘소를 찾아 새로이 봉분을 쌓고, 돌을 세우고, 묘역을 말끔히 재정비하였으며, 쌍백정 종가 사당(가묘)의 신주를 모셔와 매안하였던 것입니다. 공의 신주를 매안한 사실은 공의 11대손 정재공(휘 泰輔)께서 지으신 ‘가전(家傳)’에서도 재확인됩니다. 다음은 ‘가전’의 관련 부분입니다.

. . . . . . 처음에 선생과 부인을 개성부 동쪽의 송림현 제비원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그 장소를 잃어버렸다. 선조(宣祖) 초년에 어떤 이가 장지를 구하다가 수풀 사이에서 표석을 발견하고는 자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에 봉분을 다시 쌓고 조주(祧主=神主)를 묻고 그 사실을 돌에 새겼다. 송림현이라는 곳은 지금은 장단부(長湍府) 지역이 되었다. . . . . .(출처: 반남박씨세보 세적편)

그 후 1681년(숙종 7)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청으로 공에게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에 송도(개성)에 박상충의 사우(祠宇)를 세워 치제(致祭)하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숙종실록). 1683년(숙종 9) 유림의 공의로 송도 오관산(五冠山) 남쪽 기슭에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1685년(숙종 11)에는 ‘오관(五冠)’이라고 사액(賜額) 되었으며, 그 뒤 1702년(숙종 28) 개성부(開城府)의 생원 김진(金晉) 등의 상소로 공의 10대손 문순공(휘 世采)을 배향(配享)하게 되었습니다. 1740년(영조 16)에는 영조(英祖)가 친히 행행(行幸)하여 치제도 하였습니다(승정원일기). 그 뒤 1871(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하였다고 합니다(고종실록). 물론 지금은 공의 묘소와 서원(터)이 북한 지역이라 현재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위에서 두서없이 언급한 내용이 문정공의 신주 매안과 관련된 대략의 사정이오니 종원님들의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2년 12월 13일
승혁 올림

참고: 매안(埋安) 매주(埋主) = 조매(祧埋) = 예안(瘞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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