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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견(卓見)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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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18 23:27 조회933회 댓글0건

본문

 

이 책은 구한말 대원군의 치세를 다루고 있으나 본 글에서는 천주교와 대원군

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저자 반남 이순(耳純) 朴齊絅( 박제경)의 비판적인 견해

만을 다루고자 한다. 이책은 1884년 12월 4일의 개화파에 의한 ‘쿠테타’였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불과 3일천하(三日天下)의 실패로 끝난 뒤 1886년 일본

에서 출간되었다. 원래 상하 2권이었는데 상권만 출간되고 하권은 행방이 확실

치 않다.

 

우선 천주교에 대한 견해이다.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박제경은 서양인에 대해 스스로 신앙을 배반하면서 남에게는 믿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천사들의 상(像)을 만들어

절한다.

★제7일 안식일(일요일)에는 신앙 이외의 다른 일은 하지 말라 하면서 항해

하는 기선(機船)이 안식일 때문에 바다 복판에 닻을 내렸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했는데 다른 나라를 병탄(倂呑)했으며

아편을 중국에 몰래 들여와 남은 해롭게 제 몸은 이롭게 하였다.

 

다음은 통치자 대원군에 대한 견해이다.

천주교에 대한 금령(禁令)을 풀어주고 서양의 학자 등을 초빙하여 서양의 발전

된 기예(技藝)를 받아들이는 것이 ‘놓아주고 소통시키는 방법’이다. 즉 상대방

을 무조건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상대의 숨통도 터놓는다는 “소에게도 비빌

언덕을 주라”고 그는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다.

천하의 대세(大勢)를 안다면 서양과 천주교(넓은 의미로 보면 천주교와 개신교

를 포함한 기독교)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도

로 삼으면 나라는 제대로 다스려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통치자의 지혜인 것이다.

천주교의 교의(敎義)와 서양의 발전된 천문, 산술(算術), 농학, 의학, 기계, 물리

(物理)는 관계가 없으며 서양인을 후하게 대접하여 그 발전된 기예를 익히면

(국민의 민도가 높아져) 천주교를 비롯한 사교(邪敎)가 횡행할 일은 없으며 저절

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는 대원군이 늙은 데다가 세계정세에 어둡고 가진 학식도 많지 않아 천주교

의 외국인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가 그 불행한 금망(禁網)에 걸렸다고 하였다.

 

서양 여러 나라가 후진국을 제압하는 방식의 하나는 일단 선교사(천주교의

신부나 개신교의 목사; 조선에 관해서라면 주로 천주교의 신부를 말하고 때론

그 위의 주교까지 포함한다)를 파견하고 그 신앙이나 포교 방식이 현지의 전통

과 달라 서양의 선교사와 현지의 신자 된 자들이 박해받을 때 병력이나 군함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정벌하는 것이다. 즉 적이 도발하도록 만들고 이를 무력

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현대에도 미국인은 자기들이 전 세계를 기도교화 하여야

한다는 찬란한 운명(splendid destiny)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이는 비기독교

국가가 원하는 바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박제경의 천주교의 교의와 그 발전된 기예와는 무관하다는 견해는 서양

인들의 현실 배반 행위를 알고 하는 것이기에 타당하게 보인다.

또한 그는 무엇인가를 금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 후에

그것에 넘어간 백성들이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면 되는 것이지 혹독한

형벌은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너그럽게 다스리면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번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원군의 무지함(?)과 지혜롭지 못함을

꾸짖는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점이 갑신정변을 전후한 1880년대 이전이라고 볼 때 박제경의 관점은

매우 실용적이며 또한 서양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현대의 일류 지식인 못지

않은 혜안(慧眼)과 통찰력(洞察力)을 가졌다고 하겠다.

 

참고로 이 책은 박제경이 본문을 쓰고 배전(裵㙉)이 그에 대한 해설이나 평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는 경남 김해의 아전(衙前) 출신으로 이 책을 쓴

즈음에는 서울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의 호는

차산(次山)인데 박제경이 개명하여 이름을 제형(齊炯)이라고 했듯이 원래의

차산(此山)에서 바꾼 것인데 역시 개화파로서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순 박제경과 차산 배전은 생몰연대가 미상이다. 무엇보다 반남

박제경을 족보에서 찾을 수가 없음이 아쉽다.

한편 이책의 서문(序文)을 쓴 이수정(李樹廷, 1842~1886년)은 전남 곡성 출신

으로 일본의 요청에 의한 동경제국대학의 한국어 강사로 선발되었으며 기독교

신자로 조선 최초의 성서 번역가이다. 그는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와 연세

대학교의 전신 연희전문의 설립자인 언더우드에게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인물로 1886년 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 후 귀국하던 해에 조정에 잡혀 처형

당했는데 개화파인 김옥균에 의해서도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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