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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일반 | Re: 반남박씨 문과급제자 204명

페이지 정보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1-31 17:25 조회1,002회 댓글6건

본문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반남박씨 문과급제자를 살펴 보았습니다.

 

1. 고려문과 3명 (尙衷, 尙眞, 訔),  조선문과 201명 (孟智, 崇質~勝穆, 勝億)으로 합계 204명이며, 

   그 중 장원급제자는 15명입니다.

장원명단.png

 

2.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발표한 조선문과 201명에서 重試합격자 중복 2명 (泰尙, 泳薰), 임진보 미등재자 1명 (澧陽 : 평양 거주)을 제외하면 임진보에 기록된 인물은 198명(고려문과 포함 201명) 입니다. 

 

3. 한편 2014년 발행한 편람에서 162쪽의 12세 居仁(족보명 安仁)은 임진보 6-134로서 경신보까지는 상세 기록이 없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족보 상세 기록이 추가되었습니다. (임진보에 과거급제한 1548년을 생년으로 기록한 오류가 발견되었음)

박안인-족보.png

 

박거인-안인.png

 

국조문과방목.png

 

국조방목.png

 

국조방목장서각.png

 

국조방목-중앙도서관.png

 

4. 편람 164쪽의 17세 載時는 字聖之, 父煥 1656생으로 문과방목에 기록되었으나, 임진보 13-110에는 載時(字千一, 父文煥 1716생)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同名異人이거나 5세직장공파 족보 기록의 오류로 보입니다.  

 

5. 편람 172쪽의 23세 灃陽 (父鑂, 祖東星, 1848생, 고종28 신묘1891 을과2위 평양거주)은 족보에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전자세보심사위원 반성부원군후 宗緖 배상

 

 

 

 

댓글목록

允中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居仁 = 安仁 이란 분에 대한 소견.

반남박씨 최초 족보인 임오보(1642년) 41쪽에는 호군 寅弼의 차남 升明에게 4남이 있는데,
첫째 安仁, 둘째 安義, 셋째 安禮, 넷째 安信이라고 나온다.
安을 돌림자로 쓰고, 五常(仁義禮智信)을 이름에 넣어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 했다고 생각된다.
(원래 넷째 아들 安智가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들의 이름에서 보듯이 아버지 升明은 성리학에 깊게 심취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당연히 자식들이 성리학을 工夫하도록 勸勉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朴居仁은 1548년 중종(中宗)의 부태묘를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된 別試에서 합격자 22명중 17등을 차지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명종실록8권, 명종 3년 1548년 10월 5일 병오
 -별시 전시를 보아 문과 생원 김홍도 등 23인, 무과 이난 등 19인을 뽑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이때 문강공(冶川 朴紹)의 첫째 사위 李希伯(한산이씨)은 11등을 차지했다.

朴安仁은 초명이 居仁인데, 아버지 升明이 論語의 가르침을 받들어 居仁 (仁에 居處한다)이라 이름하고, 후에 改名하여 安仁 (仁을 편안히 여긴다)으로 바꾸었다.

居仁과 安仁이라는 이름은 논어 里仁편에서 따온 듯 하다.
1. 子曰 里仁爲美하니 擇不處仁이면 焉得知리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이 仁厚한 것이 아름다우니, 가려서 仁에 居處하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2. 子曰 不仁者는 不可以久處約이며 不可以長處樂이니 仁者는 安仁하고 知者는 利仁이니라.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仁하지 못한 자는 오래도록 곤궁함에 살 수 없으며, 오래도록 즐거움에 살 수 없으니, 仁한 자는 仁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자는 仁을 이롭게 여긴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朴居仁 vs 朴安仁>
1548년(명종 3년): OO朴氏 朴居仁 무신 별시 병과 13위(17/22) 급제
1562년(명종 17년): <都事 朴居仁> (왕조실록)
    도사 朴居仁은 고령인(高靈人). 父: 박승수(朴承璲), 祖: 박장(朴璋)(고령박씨족보).
    朴居仁의 아버지 朴承璲는 字가 윤수(潤叟)이며
    중종 5년(1510) 경오식년시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한 인물(사마방목).
1581년(선조 14년): 반남박씨 朴安仁의 장남 朴濂 출생 (반남박씨세보)
1632년(인조 10년): <部將 朴濂> (승정원일기)
1642년(인조 20년): <部將 朴濂> (나주박씨 임오보) <朴濂: 1581~1656>

참고:
임오보 당시(1642년) 반남박씨(나주박씨) 朴安仁의 장남 朴濂은 생존해 있었으며
관직을 <部將>으로 족보에 기록하였음.
그런데 부친 朴安仁의 문과 급제와 관직은 왜 족보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允中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위 댓글에서 "고령인(高靈人) 朴居仁(단천군수)  父: 박승수(朴承璲:생원), 祖: 박장(朴璋:하양현감)
 - 曾: 박수산(壽山:무과-어모장군) - (1987년 고령박씨족보 4권 521쪽)."

1. "1562년(명종 17년) : <都事 朴居仁> (왕조실록)"에 기록된 都事 朴居仁이 고령인(高靈人)이라고
    하셨습니다.
  (1)  默齋日記에 1559년02월07일 "고령에 사는 사람이 박거인(朴居仁)의 편지를 가져왔는데, 약에 대해
      묻고 갔다." 는 기록이 있으며,
  (2) 1940년 발행된 교남지(嶠南誌 5책 성주군)에 "고령 출신 朴居仁은 문과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다"
    는 기록(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본관을 나타내지 않았음)이 있으나,
  (3) 고령박씨 족보에 朴居仁(19세-현감공파)은 군수를 지냈다고 하나, 문과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령박씨대종중에서도 문과급제자 명단에서 제외하였음)
  --+ 朴安仁의 종조부 朴寅亮이 경북 예천에서 살았으므로, 동생 朴寅弼 및 朴升明, 朴安仁 등이
        예천의 근방인 고령(성주)에 거주하지는 않았을까?

2. 문과방목의 반남인 朴居仁(字 德器, 父升明 祖寅弼)과 고령인 朴居仁이 동일 인물이라면
  --+ 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18세기에 작성된
      문과방목의 내용은 엉터리라는 말이 된다.

3. 18세기에 누가 어떤 의도로 문과방목을 허위로 기록했을까?
    (고령인을  반남인으로 둔갑시키고 字, 父, 祖, 曾祖 까지 상세하게 허위사실을 기록했다니?)
  한국학중앙연구원 담당실장에게 문의하니, 문과방목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데이터화 했을 뿐 眞僞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문과방목 기록이 오류라는 객관적인 고문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 고령박씨 박거인은 아들이 없어 계자가 대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그 후손들은 사실상 몰락 수준으로 간 것으로 보임. 따라서 선대의 행적을 제대로 족보에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음.
      박안인의 부친 박승명은 김포에 살았고 선후대 산소도 김포에 있으므로 그 맏아들인 박안인도 김포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음.

2. 문과방목 전체를 '엉터리'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 후세에 만든 문과방목(종합방목)에 나오는 인적 정보는 나중에 보충한 것이 대부분임. 그중에는 잘못 보충된 부분이 있을 수 있음.

3. 의도는 알 수 없음. 인적 정보를 보충한 사람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음. 본관을 반남으로 특정하고 나면 父, 祖, 曾祖는 자동으로 연계되므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임.
  한 가지 의문: 字(德器 또는 德基)의 출처는???
  참고: 종합방목 중에는 본관(+계보)을 그냥 빈칸으로 둔 것도 있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물론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는 이런 문제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음.


추가 의문:
위 임진보 <安仁> 방주 끝 부분에 나오는
"신단(新單)에는 벼슬은 첨정(僉正)이고 록영공신(錄寧功臣)이며 금주군 사당에 부(附)했고 . . ."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음.
혹시 금주군이 錦洲君(朴炡)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允中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3번과 관련하여 여전히 의문스러운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국조문과방목'이 18세기에 작성되었다고 하니, 작성자가 朴居仁을 반남박씨라 생각했다 해도 임오보 또는 병술보를 참고했을 것이고, 족보에는 朴安仁으로 기록되어있는데, 무슨 근거로 朴安仁을 朴居仁이라 판단하여 朴安仁의 字를 德器라 짓고, 父 祖 曾祖 이름을 朴居仁의 문과방목에 기록했을까요? (무엇인가 연결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

추가 의문 사항과 관련하여, 2012년 당시 수단 심사위원들이 무엇을 참고하여 있지도 않는 내용을 적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녹영공신'이란 것이 '寧社原從功臣'을 말하는 듯한데, 장서각 '寧社原從功臣錄券'을 살펴보았으나 朴安仁 또는 朴居仁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족보 정리 작업을 시행하여 정리해야 할 사항이라 생각됩니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朴居仁 문제와 관련하여:

(1) 1548년(명종 3) 무신 별시 문과 급제자 朴居仁이 반남박씨 朴安仁과 동일인인가, 아닌가?
(2) 朴居仁의 본관이 고령(高靈)인가, 아닌가?

(1)과 (2)의 문제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論議)의 제1차 초점은 (1)에 있습니다. (2)는 나중 문제입니다.


"록영공신(錄寧功臣)"과 관련하여:

아마 앞 세보의 기록을 번역하면서 저지른 실수인 듯합니다.
거기에 보니 "新單云官僉正錄寧國原從功臣"이라고 나옵니다.

<寧國原從功臣錄券>에 '첨정(僉正) 박안인(朴安仁)'이 올라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원종공신은 1644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 등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훈과 관련된 것이므로 시기적으로 반남박씨 박안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영국원종공신 첨정 박안인은 본관이 밀양으로 1597년(선조 30)생이며 1629년(인조 7) 별시 무과(武科)에 급제한 인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금주군 사당에 부(附)했고 . . ."라는 부분은 해석 불가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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