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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의견 | Re: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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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2-08 14:42 조회767회 댓글3건

본문

<편의를 위해 존칭을 쓰지 않으니 양해 바랍니다.>

 

의문1:

문과급제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예요 출세의 출발점이었다. 만약 집안에 문과급제자가 나오면 온 문중이 축하하고 널리 세상에 알렸으며 당연히 그것을 족보(세보)의 기록으로 남겼다. 족보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 근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가문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과급제와 관직은 족보 기록의 가장 중요한 항목의 하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손들이 조상의 영예로운 일을 족보에 누락시키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자손들이 몰락한 경우를 제외하고).

 

1548년(명종 3) 무신별시에 박거인(朴居仁)이라는 인물이 급제하였다. 어떤 이는 그 박거인이 바로 반남박씨 박안인(朴安仁)이라고 한다. 1642년(인조 20) 최초의 나주[반남]박씨족보(임오보)가 경상도 영천(=영주)에서 간행되었다. 그 족보(임오보)에 박안인(朴安仁)이 올라 있다. 임오보 당시 박안인의 장남(5남매의 맏이) 박렴(朴濂: 1581~1658)은 생존해 계셨다. 박렴의 당시 관직은 <部將>으로 임오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친 박안인의 방주에는 문과급제나 관직 기록이 없다. 그 뒤의 계해보(1683년), 병술보(1766년) 등도 마찬가지인다(다만, 아들 박렴의 관직이 <部將>에서 <主簿>로 바뀌었음). 왜 아들의 관직은 기록하면서 정작 '가문의 영광'인 부친의 문과급제와 관직은 족보에 올리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올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대답이 아닐까?

 

의문2:

선조(宣祖) 초에 반남박씨 5세 반남선생[박상충朴尙衷]의 산소를 재발견하여 후손들이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소고공(박승임)이 짓고 남일공(박응남)이 썼다. 그 비문 속에 박영, 박승간, 박승임, 박응남, 박응복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박영(朴詠)은 1538년(중종 33) 무술알성시, 박승간(朴承侃)과 박승임(朴承任) 형제는 1540년(중종 35) 경자식년시, 박응남(朴應男)은 1553년(명종 8) 계축별시, 박응복(朴應福)은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시에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분들은 바로 朴居仁이라는 인물이 문과에 급제한 1548년(명종 3)을 전후하여 문과에 급제한 나주[반남]박씨 인물들(반남선생 후손들)이다.

 

그런데 반남선생 묘비문 어디에도 박거인은 물론 박인인이라는 이름은 없다. 비문을 지은 박승임은 나주[반남]박씨 박안인과 9촌 사이이고, 비문을 쓴 박응남은 박안인과 8촌 사이이다. 만약 문과급제자 관인(官人) 박거인이 반남박씨 박안인이라면 박승임/박응남 등이 그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ㆍ군수(郡守) 등의 관직을 역임한 박거인(또는 박안인??)의 이름은 묘비문에 없다. 나주[반남]박씨 종중의 크나 큰 자랑(문과급제와 관직 역임)이 될 인물을 왜 빠트렸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도 역시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대답이 아닐까?

 

부탁 말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 올린 것 뿐이오니 상상에 의한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승혁 頓首


 

댓글목록

한가람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역사적인 사실을 토론할때는 전거(典據)에 의해서 해야된다.
 전거가 부족하니 상상을 통해서 자기주장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토론이 아니다
인량할아버지가 고령근처인 예천 문경에 사셨기에 인필할아버지와 후손이 고령에 살았을 것이라는 상상         
숙천공 부터 인필할아버지 후손은 모두 김포에 거주했고 산소가 전부 김포에 있다.
교통이 발달된 지금도 고령과 예천은 가까운 지역이 아닌데 그 옜날에도 가까운 곳일끼
억지로 안인할아버지와 거인을 동일인 이라고 주장할것인지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인(安仁) 할아버지는 인필(寅弼) 할아버지의 (사실상) 장손(長孫)이십니다.
그런데 부친(升明)/조부(인필)의 거주지를 떠나
저 멀리 종조부(寅亮 할아버지)가 사시는 경상도 예천과 가까운(?) 고령땅으로 가서 사셨다???
(사실, 예천과 고령이 같은 경상(북)도이기는 하지만 그리 가깝지 않음.)
지나친 상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4kraphs8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4kraphs8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의문3:

임진보(2012년 간행)에 보면 安仁 할아버지의 초명(初名)이 거인(居仁)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1차 임오보(1642년)에서부터 제7차 경신보(1980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安仁>으로만
되어 있었는데 임진보에 와서 갑자기 초명이 <居仁>이었다고 추가하였습니다.
아마 이것은 문과방목(후세에 작성한 종합방목)에 맞춘 것이겠지요.

그런데 1548년(명종 3) 무신별시 급제자 朴居仁 이후
모든 자료(명종실록, 묵재일기, 교남지, 고령읍지, 하동읍지 등등)에 오로지 朴居仁으로만 나옵니다.
반면에 반남박씨 족보(세보)에는 한결같이 朴安仁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설마 居仁이라는 휘자를 쓰시다가 세상 떠나시기 직전에 安仁으로 개휘하신 것일까요?

安仁 할아버지의 초명이 居仁이었다면 반남박씨세보에 진즉 표시를 했겠지요.
아드님이신 주부공(박렴)을 비롯하여 후손들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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