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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휘 박상충) 「潘南先生褒贈紀事碑」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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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51 조회1,8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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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선생포증기사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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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선생포증기사비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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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충(朴尙衷) 반남선생(潘南先生)의 포증(褒贈) 전말과 사적을 적은 비문(碑文)의 탁본.
찬자(撰者※책이나 글 따위의 지은이.)는 박세채(朴世采)이며,
서자(書者※ 글이나 글자)는 역시 후손인 박태유(朴泰維※서계공 휘 박세당 큰아들)이다.
비문의 말미에는 음기(陰記※비석의 뒷면에 쓴글) 형식으로 수갈 당시 자손(子孫) 참가자의 명단이 추각(追刻)되어 있다. 보존 상태가 다소 불량하여 좀을 먹은 흔적이 많고, 일부 글자는 마모되어 있다.
박세당(朴世堂)의 필첩인 <先蹟>에도 비문의 초본이 필사되어 있으며, 총 字數는 891字이다.
이 비문은 박태유(朴泰維)의 여러 글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로 안진경체(顔眞卿體※ 중국 당나라 서예가)의 서풍이 유감없이 발휘된 명품이다.박상충(朴尙衷 1332-1375)은 반남박씨의 입경조로 박세당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그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인으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학자·관료였다.
그는 반남에서 출생하였으나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하는 과정에서 향리의 자손에서 중앙의 사대부 관료로 발돋움하는 한편 선대의 세거지 나주를 떠나 송도로 이거하게 되었다.
즉 박상충의 송도이거는 향리가문에서 사대부가문으로의 전환인 동시에 반남박씨 경파(京派)의 탄생을 의미했다.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색은 그의 스승인 동시에 처남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식과 문한을 자랑하던 한산이씨 목은가문과의 혼맥은 박상충의 학문·사회적 기반을 강화해 주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정몽주·전록생(田祿生) ·이첨(李詹) ·김구용(金九容)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한 시대의 문풍을 주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동문선(東文選)』에도 다수의 시(詩)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해박한 예학적 지식을 바탕으로『사례(祀禮)』를 편찬하는 한편 삼년상을 몸소 실천함으로서 유교적 예제의 정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에 그의 정치적 생애는 순탄치만은 않아 친원파의 거두 이인임(李仁任) 일파와 대립하다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중 청교역(靑郊驛)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그는 비명에 죽었지만 세인들로부터「반남선생(潘南先生)」으로 칭송되며 대대적인 현양사업이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 대한 현양사업의 단초를 연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1681년(숙종 7) 송시열은 정몽주의 추숭사업에 즈음하여 박상충에 대한 포증을 함께 건의하였다.
이를 가납한 숙종은 예관(林泳)을 보내 박상충의 영전에 치제하는 한편 영의정에 추증하고 文正의 시호까지 내렸다.
나아가 오관서원(五冠書院 開城)·반계서원(潘溪書院 羅州)에 친필 편액을 내려 사액함으로서 전조 절신(節臣)에 대한 지우를 다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흥기된 후손들은 1682년(숙종 8)「반남선생포증기사비(潘南先生褒贈紀事碑)」를 건립하였고,
1709년(숙종 35)에는 박세채의 주도로『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가 간행되었다.


※안진경체
자 청신(淸臣).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북제(北齊)의 학자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맞았으며, 이때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을 위하여 싸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헌부상서(憲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감금당하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동문선
신라 시대부터 숙종때 까지 시문을 모은책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고활자본(古活字本)과 목판본이 있다.

내용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고,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이다. 정편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속편은 그 이후부터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1914년에는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하였으나 속편이 누락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1968∼19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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