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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敬公 朴性陽

페이지 정보

박승우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1:59 조회1,794회 댓글0건

본문

1809(철종9년)~1890(고종27년) 82세
자 = 季善 호 = 藝窓 시호 = 文敬
저서, 편서 = 예창문집 15권, 벽사명, 이학통고, 호락원류, 가례증해보유
             거상잡의, 속 통감, 국조기이
천자가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외가에서 공부하다가 이지수의 문하에 들어가
經義를 배웠다. 1866년 양이가 강화도에 침범하자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을 지었다. 송근수의 천거로 고종 17년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동부승지, 호조참판, 대사헌등을 역임했다

이상 내용은 인명사전에 기록입니다
호구지책에 얽매어 부끄러운 젊은날을 보내고 이제서야 선조님 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高祖父님은 충북 영동 산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셨답니다.
어려서 할머님께서 山林할아버지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당시에는 관심밖 이었죠.
우리 집안 어른들은 단명 하셨고 충북에 기승을 부리던 동학군에 의하여 집이 불타게 되었고 書庫도 전소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 가족史 입니다. 제가 이글을 소개하는 것은 죄송스런 마음의 부담도 덜겸,
자랑도 하고싶고, 고종 임금의 선비를 모시는 禮가 마음에 닿아서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소개합니다

고종 17년 9월 11일
諮議 朴性陽 에게 下諭 하기를
"예로부터 호걸(豪傑)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깊은 산중에 있어도 입으로는 성현의 글을 외우고,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그 도(道)를 실천하고 그 학문을 전개하며, 예물을 갖추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번연히 일어나는 것이 바로 분의(分義)이며 지원(志願)이다.
그대는 이름있는 집안의 대대로 녹을 받는 자로서 나라와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해왔으며, 병으로 초야(草野)에 있으면서 공자(孔子)의 학문을 연구하고 정주학(程朱學)의 뜻에 통달 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진실로 곤궁해져도 해이해 지지 않았으므로 일대 유림의 종앙(宗仰)하는 바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자신만을 좋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대궐에 나아와서 임금을 돕는 계책을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니,
내가 몹시 사랑하는것도 이 때문이고 그대가 일어날 때를 기다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자(世子)의 예질(睿質)이 날로 성취되고 사부(師傅)의 상견례(相見禮)도 좋은 날을 받아 놓았다. 그대에게 자의의 벼슬을 주었으니, 그대는 제때에 길을 떠나 빨리와서 빛나게하고 바른일과 바른말로 원량(元良)을 보익(輔翼)하라. 이것이 또한 내가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며 갈망하는 것이다. 가을 물에 갈대가 무성하니 그대가 완연히 있는듯 하다. 힌 말을 타고 올라와서 오늘 저녁을 함께 지내기 바란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 받으라."

고종 17년 10월 11일
자의 박성양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비록 부주(附奏)를 보기는 하였으나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기를 나는 기대 하였는데, 지금온 편지를 보니 또 다시 사양하였으니 실망을 누를 수 없다.
나는 꼭 오게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그대는 반드시 사양할 의리가 없는데도 뜻을 높이기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잇다.
그렇다면 시경(詩經)에 '현자(賢子)를 좋아하기를 치의(緇衣)와 같이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선비는 자리위의 보배로 초빙(招聘)을 기다린다' 한것은 과연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렵단 말인가? 대저 선비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쓸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덕행(德行)과 정사(政事)로 사과(四科)에 병렬 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대는 이 의리에 대해 반드시 깊이 음미하고 익숙하게 연구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세자(世子)가 서연(書筵)을 자주열고 있으므로 모쪼록 노성(老成)한 사람과 학식있는 사람이 덕성을 길러주어야 할것이다. 그대는 선뜻 마음을 바꾸고 즉시 조정에 나와 이토록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고종18년 8월 23일
자의 박성양 에게 하유 하기를
"그대를 정초(旌招) 하고부터 하루도 반드시 오게하려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다
전현(前賢)을 두루 손꼽아 볼때 또한 세상에 나와서 세상의 쓰임이 되지 않은이가 없었으니 참으로 백성에게 은택을 베푸는 방도가 본디 초야에 있을 때에 정 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대의 집안은 세신(世臣)의 고상하여 벼슬하지 않는자와 본래 차이가 있는데, 어찌하여 은둔을 굳이 지키고서 그 포부를 펼쳐 그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단정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말과 덕을 바로세워 사도(斯道)를 부지하고 돕는것을 눈앞의 급선무로 삼아야하며, 또 가을이 되어 강연과 서연이 장차 열릴것이니 그대는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며칠안으로 조정에 나와서 이 목마른 듯이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고종 18년 11월 9일
자의 박성양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 하기를
"이 해도 저물어가고 그대의 덕을 연모하는 마음이 날로 심해지는데 사임하는 상소가 이때 이르렀다. 줄곳 멀리 떠나려만 하는데 나의 말이 졸렬하고 예우가 부족해서
비록 그대로 하여금 물러가려는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게 하였으나 그대는 대대로 벼슬해온 집안의 후손이며 노성한 학문을 지니고서도 그져 혼자만 아름다운 덕을 지키면서 임금과 백성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않고 있으니,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하게하는 방도를 그대만이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것에 근본을 두지 않았는가? 더구나 지금 세자의 서연(書筵)을 자주열어서 그대가 등대(登對)하여 강론하기를 더욱 기대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런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 속히 조정에 나오라"

고종 19년 3월 11일
서연관(書筵官) 박성양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를 반드시 불러오려는 나의 마음은 갈증 정도일 뿐만 아니다. 그런데 장주(章奏)와 비유(批諭)가 다만 번거롭게 왕래하여 마치 예양(禮讓)을 숭상 하는듯 하나 허문(虛文)으로 꾸미는 것이니, 자신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 아니라 또한 그대에게 개탄 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학문에 체용(體用)이 있는것은 곧
임하(林下)에서 독서하고 나와서는 세상에 쓰여 치군(致君)하고 택민(澤民)하는것이
바로 수레를 만들 때 합철(合轍)하는 묘용(妙用)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주 물러가 자기 혼자만 지조를 지키고 절개나 지키는 선비가 되어 파뭍혀 있으면서 소문없이 지낼수 있겠는가?
봄철이 이미 저물어가고 강석(講席)과 서연(書筵)을 열게 되었으니 그대는 결연히 마음을 고쳐먹고 빨리 나오라. 탁지참좌(度支參佐)의 벼슬도 그동안 변통해서 또한
이조참의(吏曹參議)의 벼슬에 옮기는 것으로 대치 했으니 그대는 의례적으로 사양하지말고 나의 이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고종 20년 1월 20일
경연관(經筵官) 박성양에게 하유하기를
"좌불안석하며 기다린지 지금 몇해나 되는가? 나의 성의가 부족해서 아직도 멀리하는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겠는가?
불러들이려는 뜻을 살펴보면 선비들을 좋아하는데서 나온 것이지 경에게 무슨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백성들과 나라의 형편이 아주 어렵고 위급한데, 경은 연륜도 많고 학문도 깊이 연구하였으니 필시 세상을 운영하고 사물을 알아서 다스리려는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시골을 고수하고 제 일신만 돌보면서 임금을 이끌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데 대해서는 강건너 불보듯 할수 있겠는가? 나는 개탄을 금 할수 없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봄볕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경연(經筵)에서 강론하고 좋은 의견을 내는 책임과 서연(書筵)에서 도와서 이끌어 주는 일은 오직 그대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니 즉시 여정에 올라 이 두터운 기대에 부응 하도록 하라"

고종 23년 6월 1일
서연관 박성양이 상소하여 직임을 사직하고 새 자급(資級)과 과분한 상을 철회 할것을 청하니 비답 하기를
"경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두터워지고 경에 대해 그리워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 지는데 지금 올라온 상소를 보니 평소에 기대하든 바와 너무도 어긋난다.
경은 나이가 높고 학문이 순수하며 이치에 투철하니, 등용되고 해임하며 나오고 들어갈 때는 응당 확고한 근거를 밝혀야 할 것이다. 맹자(孟子)에 '어려서 배우는 것은
커서 시행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궤 안의 옥과 자리위의 구슬은 간직하여 두자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쓰기 위한 것이다. 배우기만 하고 쓰일데를 찿지않고 물러나 자기 뜻만을 고상하게 여겨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서 태연히 백성과 나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시 누구와 함께 서로 도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더구나 지금과 같이 어려울 때는 무엇보다 급선무는 원기를 배양하여 그릇된 풍속을 다스리는 것이며, 경서(經書)의 뜻을 밝혀 선비들의 추향을 단정하게 하는 일이다.
그 책임을 담당할 사람이 경이 아니고 그 누구 이겟는가?
지난번에 품계를 올려준 것이 어찌 다만 기쁨만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겟는가?
이것은 예의로 우대하는 데서 나온것이다. 옷감을 내려준 것도 나의 간곡한 성의에서 나온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세자의 학문이 성취되는 것은 순전히 경과 같은 명망이 높은 사람이 곁에서 도와주기에 달려있다. 그러니 경은 반드시 석연히 마음을 돌려 당일로 길을 떠나 애타게 기다리는 내 마음에 부응하라"

고종 24년 4월 10일
서연관 박성양이 상소하여 체직(遞職)해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여러가지 사무가 복잡한 것은 경술(經術)에 밝은 사람을 얻어서 수습하자고 생각했고, 풍습이 들뜨고 그릇된 것은 도의(道義)가 있는 사람을 얻어서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밤낮으로 마음속에 두고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지방의 먼곳에 은거하여 나를 더욱 멀리하면서 일찍이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니, 지난날에 빈번히 돈면(敦勉)한것이 한갓 의례적인 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올라온 글을 보니 더욱더 멀어지고 있어 애타게 기다리던 나머지 한탄을 금 할수 없다. 생각건데 경은 나이와 덕이 다같이 높으며 학문이 깊고 이치가 갖추어져 세상 교화를 부지하고 여론을 가라앉힐 것으로 자연히 크게 기대되었다.
그 뿐아니라 세자의 학문이 발전하는것은 순전히 경과 같은 노성한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경서(經書)를 가지고 가르치고 인도 하는데 달려있다.
날씨도 풀리고 해도 길어져 서연(書筵)을 장차 열게 되었으니, 경은 선뜻 마음을 돌려 몹시 기다리는 나의 뜻에 답하기를 바란다"

고종 25년 2월 15일
전교 하기를
"서연관(書筵官) 朴性陽 이 올해 80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더욱 우러러 보게된다. 호조(戶曹)에서 옷감과 음식을 넉넉히 실어 보내게 하고 지방관을 보내서 문안 함으로서 예우하는 뜻을 보이도록하라"

고종 27년 10월 18일
經筵官 朴性陽 卒하다.
전교 하기를
"박 산림(山林)은 나이 많고 학문이 깊으며 지조가 굳은 사람으로서 내가 經筵에 오도록 자주 명령을 내려 간곡히 불렀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보고를 들으니 슬픔을 어찌 다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장사 지내기 전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상사(喪事)에 쓸 물자를 본 도로 하여금 되도록 후하게 실어 보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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