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44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243

자유게시판

추가 자료

페이지 정보

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2:00 조회2,138회 댓글0건

본문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승우님과 같이 조상의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가장 중요한 자료인 예창 할아버지께서 시호 받으시는 기록이 빠져서 추가로 올려드립니다.
시호(諡號)란 참으로 귀중한 왕이 내리신 호(號)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에게만 내리는 이름입니다.
시호를 받는일은 가문의 영광으로 시호를 받는 의식을 행하고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나주에 있는 기오정도 문강공(휘 소) 야천할아버지께서 시호를 받을때 조정에서 신하를 특별히 파견하여 예식을 치르고 감사의 잔치를 열었던 우리 반남박씨의 역사적인 장소입나다.
우리 반남박씨에 선조님이 많으시나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으신분은 47 분이 있습니다.(※47분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타문중 보다 많은 분이 시호를 받았습니다.)
우리선조님의 시호에 대한 자료는 홈페이지 『역대인물소개』 와 『시호록』을 보시면 참고 됩니다.



순종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5일(양력) 1번째기사
지천석 등 43명의 벼슬을 추증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고(故) 승지(承旨) 지천석(池天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하고 이원배(李元培)를 이조 참판에 추증하라. 오붕진(吳鵬振)은 학식과 행실이 뛰어나고 지조와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고 참판 구완식(具完植)은 일찍이 호위하여 따라다닌 공로가 있으니 모두 특별히 정2품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하며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증 지평(贈持平) 성헌징(成獻徵)은 학문이 고명하여 영남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고 대군(大君)의 사부(師傅) 한협(韓協)은 학문이 뛰어나고 지조와 행실이 순결하고 독실하였고, 고 도헌(都憲) 박성양(朴性陽)은 덕을 수양하는 숨은 선비로서 세상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으며, 고 지평 유중교(柳重敎)는 학문이 뛰어나서 온 세상의 사표가 되었고 고 부사 민진강(閔鎭綱)은 박식하고 행실이 독실하고 조예가 깊었으며 고 교리(校理) 원숙강(元叔康)은 사초를 고친 죄로 화를 입었으니 응당 돌보아주어야 할 것이다. 모두 특별히 정2품 규장각 제학에 추증하며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라.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6일(양력) 3번째기사
         이간 등 57명에게 시호를 주고 이총 등 3명의 시호를 고쳐주다

화원군(花原君) 이간(李揀)에게 혜정(惠貞), 용성군(龍城君) 이원(李援)에게 정민(貞敏), 한산군(韓山君) 이정(李挺)에게 민절(愍節), 금천군(錦川君) 이변(李抃)에게 효의(孝毅), 청양군(靑陽君) 이건(李楗)에게 정헌(貞憲), 증 규장각 제학(贈奎章閣提學) 성헌징(成憲徵)에게 문간(文簡), 구완식(具完植)에게 무숙(武肅), 한협(韓協)에게 문목(文穆), 원숙강(元叔康)에게 정민(貞愍), 민진강(閔鎭綱)에게 효간(孝簡), 유중교(柳重敎)에게 문간(文簡), 박성양(朴性陽)에게 문경(文敬), 조인승(曺寅承)에게 충헌(忠憲), 김학우(金鶴羽)에게 헌민(獻愍), 조총희(趙寵熙)에게 충정(忠定), 김규식(金奎軾)에게 충헌(忠憲), 박영교(朴泳敎)에게 충목(忠穆), 권형진(權瀅鎭)에게 민희(敏僖), 지천석(池天錫)에게 장헌(章憲), 이원배(李元培)에게 문의(文懿), 오붕진(吳鵬振)에게 문헌(文獻), 오종찬(吳鍾瓚)에게 정헌(貞憲), 고(故) 창산군(昌山君) 성대훈(成大勳)에게 충장(忠莊), 증 내부 대신(贈內部大臣) 정순검(鄭純儉)에게 충헌(忠憲), 이운영(李運榮)에게 문간(文簡),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조유선(趙有善)에게 문간(文簡), 장응일(張應一)에게 문목(文穆), 고 농상 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명규(金明圭)에게 문정(文靖), 고 판서 정기원(鄭岐源)에게 장숙(莊肅), 홍철주(洪澈周)에게 효헌(孝獻), 성이호(成彛鎬)에게 정헌(鄭憲), 홍우창(洪祐昌)에게 정헌(貞憲), 박상은(朴尙恩)에게 무숙(武肅), 박원양(朴元陽)에게 정간(貞簡), 임상준(任商準)에게 숙헌(肅憲), 고 영의정(領議政) 김관주(金觀柱)에게 문익(文翼), 고 이조 판서 박제인(朴齊寅)에게 정익(靖翼), 이흥민(李興敏)에게 문정(文貞), 이근우(李根友)에게 효정(孝貞), 조경하(趙敬夏)에게 효정(孝貞), 정해륜(鄭海崙)에게 문정(文貞), 서염순(徐念淳)에게 문숙(文肅), 송덕상(宋德相)에게 문간(文簡), 남정순(南廷順)에게 효정(孝貞), 조병창(趙秉昌)에게 문정(文貞), 조동면(趙東冕)에게 문헌(文憲), 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민영상(閔泳商)에게 문헌(文獻), 이경하(李景夏)에게 양숙(襄肅),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書) 윤욱렬(尹郁烈)에게 충숙(忠肅), 신초(辛礎)에게 충장(忠壯), 증 좌찬성(贈左贊成) 이춘영(李春英)에게 문숙(文肅), 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주수(朴周壽)에게 익헌(翼獻), 고 특진관(特進官) 이인철(李寅轍)에게 효헌(孝憲), 윤성진(尹成鎭)에게 문정(文貞), 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최응허(崔應虛)에게 충헌(忠憲), 고 판윤(判尹) 오갑량(吳甲良)에게 정헌공(靖憲公), 고 병조 판서 오백(吳泊)에게 숙헌(肅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소민공(昭愍公) 이총(李摠)은 충민(忠愍)으로, 정헌공(靖憲公) 이유승(李裕承)은 효정(孝貞)으로, 장간공(章簡公) 이재형(李載亨)은 문간(文簡)으로 시호를 고쳤다.



시호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으로 받은 이름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시호는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나라 주공(周公)부터이다. 한국에서는 514년(신라 법흥왕 1)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여 증시를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일반 관리의 경우에는 봉상시(奉上寺)에서 주관하였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수는 194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중에 봉상시의 건의에 따라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 301자를 시호에 쓰게 되었다.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착한 행장이 없고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던 사람에게는 양(煬)·황(荒)·혹(惑)·유(幽)·여(잿) 등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의 직품이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후손들은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좋지 않은 글자가 쓰인 시호가 내려질 경우에도 다시 시호를 청하거나 개시를 청할 수 없었다.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