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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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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3:42 조회1,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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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초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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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초상.jpg


정조와 이산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 2007.11.01 22:48 / 수정 : 2007.11.01 22:48 Url 복사하기                         <조선일보> 에서 옮겨옴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위서(魏書)’를 인용해 고조선의 창건을 “고(高)임금과 같은 시대(與高同時)”라고 썼다. 원래 고(高) 대신 요(堯)라고 써야 하지만 고려 3대 정종(定宗)의 이름이 왕요(王堯)이기 때문에 음이 비슷한 고(高)자를 대신 쓴 것이다. 산 사람의 이름이 명(名)이라면 죽은 사람의 이름은 휘(諱)인데 죽은 이를 공경해 생전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상(上)에 “졸곡(卒哭)을 마치면 휘하고, 두 글자 이름은 한 자만 휘한다”고 나와 있다. 고려 말 명나라 태조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홍호(洪虎)’로 바꾸어 쓴 것도 혜종의 휘가 ‘무(武)’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 벽서사건 관련자를 처벌한 후 역적 토벌을 축하하는 과거인 토역경과(討逆慶科)를 실시했다. 이때 답안지 대신 올라온 윤혜(尹惠)의 ‘상변서(上變書)’에 선왕들의 휘(諱)가 여럿 쓰여 있자 종묘로 달려간 영조가 엎드려, “저의 부덕(不德)으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흐느낄 정도로 선왕들의 휘는 금기였다. 임금의 이름만 기휘(忌諱)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53세 때인 정조 13년(1789) 사헌부(司憲府) 감찰로 전보되자 중부(仲父)의 이름 사헌(師憲)과 같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고 박지원의 아들이 쓴 ‘과정록(過庭錄)’은 전하고 있다. 대신 태조의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을 돌보는 제릉령이 되었는데,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제릉을 돌보는 것은 큰 고생이었지만 기휘를 위해 마다하지 않았다.

근래 일부 드라마나 서적들이 ‘정조’라는 묘호(廟號) 대신 ‘이산(李 )’처럼 이름을 쓰는 풍조가 생기고 있다. 익숙한 묘호 대신 생소한 이름을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기이한 것을 좋아한다고 비판받았던 박지원이 중부의 이름을 피휘해서 핵심 권력 기관인 사헌부를 마다하고 능참봉과 다를 바 없는 제릉령으로 간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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