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79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78

자유게시판

근무처 없는 벼슬

페이지 정보

승모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4:23 조회2,798회 댓글0건

본문


근무처가 없는 벼슬: 산직(散職)과 영직(影職)
박 승 모

우리는 여러 성씨들의 족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벼슬 이력을 보이는 경우를 대한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관직이나 품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족보에 기록된 관직, 또는 관품(官品)들이 어떤 수준/등급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막연히 “훌륭한 인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런데 일견 화려해 보이는 그러한 벼슬들은 놀랍게도 실제로는 근무처가 없는 이름뿐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고의 목적은 조선시대의 품관(品官) 체계와 족보에 흔히 등장하는 근무처 없는 관직, 즉 허직(虛職)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려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무백관(文武百官)(즉 東西兩班)의 품계(品階)는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종6품 이상은 쌍계(雙階)였고 정7품 이하는 단계(單階)여서, 모두 30계(階)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품계의 구분은 1품에서 9품에 이르기까지 9개의 품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각 품마다 정(正)과 종(從) 2개의 급(級)을 두어 18등급으로 나누어진다(9품×2급=18등급). 여기서 또다시 정1품에서 종6품까지를 상계(上階)와 하계(下階)로 세분하여 24등급으로 나눔으로써(6품×2급×2계=24계급) 정7품에서 종9품까지의 6등급(3품×2급=6등급)을 합하여 총 30계(階)의 등급으로 구성된다. 즉 최상급 정1품(正一品) 상계(上階)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서 최하급 종9품(從九品) 장사랑(將仕郞)(문)/展力副尉(무)에 이르기까지 30등급으로 나누어졌다.
거기에다 다시 (1) 당상(堂上)(정1품 상계에서 정3품 상계 통정대부(文散階)/절충장군(武散階)까지), (2) 당하(堂下)(정3품 하계 통훈대부(문)/어모장군(무) 이하) (3) 참상(參上)(종6품 하계 선무랑(문)/병절교위(무) 이상), (4) 참하(參下)(정7품 무공랑(문)/적순부위(무)에서 종9품 장사랑(문)/전력부위(무)까지)로 구분하여 신분상의 대우에 많은 차이를 두었다. 참상은 다시 (가) 대부․장군참상(大夫將軍參上)(정3품 하계 통훈대부(문)/어모장군(무) - 종4품 하계 조봉대부(문)/선략장군(무))과 (나) 낭관․교위참상(郎官校尉參上)(정5품 상계 통덕랑(문)/과의교위(무) - 종6품 하계 선무랑(문)/병절교위(무))로 나누어 대우가 달랐다.

관직의 정식명칭은 계(階)-사(司)-직(職)의 순서로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다. 階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계급이고 司는 근무처를 말하고 職은 보직(補職)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영의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이라고 표시한다. 원래 품계와 관직은 규정에 의해 상응하도록 정해져 있었으나 품계와 관직이 상응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는데 이 경우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표시하였다. 예컨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관계(官階)를 가진 사람이 정2품의 관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정대부행(行)이조판서>라고 하여 사(司)(이조) 앞에 “행(行)”을 붙이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의 관직인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이 되면 <가선대부수(守)홍문관대제학>이라고 하여 사(司)(홍문관) 앞에 “수(守)”를 붙였다.

그런데 여러 성씨들의 족보에 보면 司(근무처) 표시 없이 階(계급)나 職(보직, 즉 벼슬이름)만 표시된 경우가 많이 나오는데 이런 경우 실제 벼슬을 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즉 직사(職司)(실제 근무처)는 없고 직함(職銜)만 있는 허직(虛職)인 경우이다. 허직은 일종의 명예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허직(虛職)은 크게 증직(贈職)과 산직(散職)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산직은 다시 산관직(散官職), 영직(影職), 노인직(老人職) 등으로 구분된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증직(贈職): 공신, 충신 등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 효자나 학덕이 높은 사람 등이 죽은 뒤에 관직을 주거나 기존의 품계를 올려 준 것을 말한다. 예컨대,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영의정의 증직이 주어졌다. 또한 자손의 관직에 따라 죽은 그의 3대 조상(부, 조, 증조)에게 증직하기도 했는데 이를 추증(追贈)(또는 추영(追榮))이라고 한다. 추증의 경우, 부모는 본인과 같은 품계로,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각 한 단계씩 아래 품계로 추증하였다. 추증은 오늘날의 추서(追敍) 제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 산직(散職): 근무처는 없고 이름만 있는 관직의 통칭이다. 고려시대의 검교직(檢校職), 동정직(同正職), 첨설직(添設職), 조선시대의 산관직(散官職), 영직(影職), 노인직(老人職) 등이 이에 해당된다. 산직이 발달한 주요 원인으로는, (1) 사대부 층의 관직 획득 욕구에 비해 실직(實職) 수의 부족, (2) 진급자, 군공자(軍功者), 역역(力役)·서리(胥吏) 복무자, 기타 공로자에 대한 포상을 위한 실직 수의 부족, (3) 국가 공로자라 하더라도 평민 및 노비 출신에게 실직을 줄 수 없는 사정, (4) 국가재정부족에 따른 매관매직용 산직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산직의 남발은 신분제 문란과 면역(免役) 계층을 증가시키고 관료들을 부패시키는 여러 가지 폐단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고려 후기의 첨설직 남발은 고려사회를 붕괴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산직(散職)과 산계(散階)(文武散階)를 이원화하여 평민이나 역역(力役)복무자에게는 영직(影職), 잡직계(雜織階), 토관계(土官階)를 수여하고, 노인직(老人職)이나 영직 보유자의 특권을 제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 타개를 위해 돈을 받고 산관직을 파는 납속책(納粟策)이 시행되면서 산직이 남발되어 신분제 붕괴와 삼정문란의 원인이 되었다.

(가) 산관직(散官職): 산관(散官)이란 실제 근무처는 없고 명칭만 있는 관직인 산직(散職)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원래는 품계인 산계(散階)를 보유한 사람을 뜻하는데, 해당하는 품계의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산계는 과거, 음서(蔭敍), 진급, 포상, 대가(代加) 및 역역(力役)의 대가(對價) 등 여러 이유로 주어지거나 승진되었다. 그러나 관품(官品) 자체는 관직(官職)이 아니었다. 관직에 결원이 생기면 관직에 해당하는 품계를 가진 사람 중에서 적정 인물을 뽑아 임명했다. 그리고 관직에 일정기간 복무하거나 공을 세우면 관품을 올려주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최종 관직 때까지 보유한 관품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산관이 되며, 음서, 부세(賦稅), 형벌 등에서 일정한 특권을 보장받았다. 즉 관리는 삭직(削職)되지 않는 한, 퇴관(退官)하더라도 그 품계를 보유하고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관료군(官僚群)이 증가하여 인사적체가 심해지자 1443년(세종 16)부터 양반관료에게도 실제 근무처가 없는 관직만 부여하는 산관직(일종의 명예직)을 폭넓게 운영했다.

(나) 영직(影職):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산직(散職)이다. 직함(職銜)만 있고 직사(職司)는 없는 그야말로 “허직(虛職)“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검교직 등 기존의 유급(有給) 산직을 혁파하고, 세종 때부터 무급(無給) 산직인 영직(影職)을 만들었다. 산직(散職)이므로 정해진 수가 없고,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 아전, 조군(漕軍)(漕運활동에 종사하던 선원), 수군(水軍)에게까지 주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부터 남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직을 사용하는 경우는 크게 4가지였다. ① 일반 병종(兵種) 거관자(去官者)(임기 만료되어 다른 직종에 재임용되는 자)에 속하는 충순위(忠順衛), 정병(正兵), 파적위(破敵衛), 관령(管領), 수군, 조졸(漕卒)(=漕軍)에게 주는 영직. 이들은 모두 양인(良人)이거나 천인(賤人)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군역(軍役)에 대한 반대급부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반민을 양반으로 만들 수는 없어 모두 영직을 주었다. ② 성중관(成衆官: 세조 이후는 녹사綠事), 별좌(別坐) 거관자(去官者)에 속하는 자들에게 주는 영직. 세종 말년 이후에는 상급서리였던 성중관 거관자로 이미 경관 및 외관 임명후보자 명부에 오른 자들도 승진하지 못해 적체가 심하였다. 이에 자원(自願)에 따라 영직을 주게 했으며, 체아직(遞兒職)(3개월 또는 6개월 마다 바뀌는 관직)을 준 뒤 한 번만 봉급을 주고 바로 영직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③ 가자(加資), 군공(軍功)포상 등을 받은 자들에게 주는 영직. 1444년(세종 26)에 노인직, 군공포상, 원종공신(原從功臣), 응사(膺師), 이전(吏典)거관, 백관가자(百官加資) 등에는 영직인 산관직을 주도록 했다. ④ 납속(納粟) 등의 대가로 주는 영직. 조선 후기에 납속책에 따른 매관매직이 증가하면서, 노인직·증직(贈職)과 함께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이 같은 관계로 영직은 명예직에 머무를 뿐 원칙적으로는 일반관료가 누리는 특권까지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평민들이 이를 이용하여 국역(國役)부담에서 벗어났으므로, 17세기 이후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다) 노인직(老人職): 노직(老職) 또는 수직(壽職)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80세 이상된 노인에게 주는 산직(散職)의 일종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첨설직, 검교직, 동정직 등 고려 때의 산직이 폐지되고 새로운 산직체계가 성립되었는데, 이때 생겨난 관직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노인직조(條)에 의하면 80세 이상은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1계급을 주고, 원래 관계(官階)가 있는 사람에게는 1계급을 올리고 당상관에게는 왕명에 따라 주었다. 이러한 규정은 〈대전통편〉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종친(宗親) 가운데 부수(副守) 이상으로 80세가 되었거나 봉군(封君)의 부친이나 시종신(侍宗臣)의 부친, 지방장관의 부친으로 70세 이상이 되면 매년 정초에 가자(加資)하도록 했다. 또 동반, 서반 관리로서 4품관 이상의 실직(實職)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 80세 이상된 자도 가자했으며, 사족(士族)의 부녀자 가운데 90세가 된 이와 서민(庶民)의 경우 100세가 된 이에게 가자했다. 이와 같이 노인직은 신분에 관계없이 80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주는 것으로,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에게는 별로 특전이 없고 양반(兩班) 관료(官僚)들에게는 가자(加資)(資級을 더해주는 것. 즉 위계를 올려줌) 등의 특전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제도가 문란하게 운영되어 사서인(士庶人)(5품이하의 관료 및 양인) 중에서 높은 위계를 받기도 했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조선조에는 실제 근무처가 없는 여러 종류의 이름뿐인 관직(품계)이 있었으며 조선 중&#8228;후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재정난 타개 등을 이유로 이러한 허직(虛職)들이 남발되어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붕괴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허직의 남발은 그 자체로서는 문란한 관직체계의 한 단면을 보이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구시대의 신분제도를 무너뜨리는 순기능적인 면도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 성씨들의 족보에 나타나는, 일견 화려해 보이는 관직 기록은 실직(實職)이 아니라 허직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허직 조차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서 조작하거나 터무니없이 부풀려서 기록한 것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참고문헌: 국사대사전(이홍직편), 엠파스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학원대백과사전(학원출판공사), 한국브리태니카백과사전, 엔사이버두산백과사전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