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오정(寄傲亭) 전남도지정 문화재 제266호에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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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4:44 조회2,005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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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다시면 회진리 동촌마을 영산강변에 위치한 기오정이
전남도지정 문화재 제266호에 지정 예고를 받아 그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다.
기오정은 조선시대 현종10(1669년)에 반남박씨 박세해(朴世楷 1615~1698)에 의해 세워진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골 기와집이다.
공간구성은 서쪽 2칸은 마루이며 동쪽 2칸은 방과 툇마루로 구성됐으며
1666년 처음 건립한 이후 영조 21년인 1745년과 1934년 1981년경에 각각 중수를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해서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주의 한구절인 의남창이기오(倚南窓以寄傲)에서 유래한 어원으로 창 밖의 대 자연의 흥취를 즐긴다는 도연명의 시혼이 담긴 이름이다.
정자의 현판은 이조 중기의 명필가인 원교(圓敎) 이광사(李匡師)의 친필로 그의 독특한 필법을 엿 볼 수 있다.
영산강변에 위치한 여러 정자 중의 하나인 기오정은 조선 후기 문인교류와 후학 강학의 장소로 쓰였던 공간으로 유상운(柳尙運 1636~1707)의 중수기문을 비롯한 문인과 후손의 현판 9개가 걸려 있다.
현판 글씨는 원광 이광사 글씨
이광사 [李匡師, 1705~1777]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양명학자. 정제두에게서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에게 전수하였으며, 원교체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후진들을 위한 귀중한 자료를 남겼으며 조선의 서예중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본관 전주(全州)
호 원교(圓嶠) ·수북(壽北)
별칭 자 도보(道甫)
활동분야 예술
주요저서 《동국악부(東國樂府)》 《원교집선(圓嶠集選)》 《원교서결(圓嶠書訣)》
주요작품 《영의정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본관 전주(全州). 자 도보(道甫). 호 원교(圓嶠) ·수북(壽北).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될 때 이에 연좌, 회령(會寧)에 유배되었으나 학문으로써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자 다시 진도(珍島)로 옮겨져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서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令翊)에게 전수하였으며,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眞) ·초(草) ·전(篆) ·예(隸)에 모두 능하였고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한편 저술을 통해 후진들을 위한 귀중한 자료를 남겼으며 조선의 서예중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 《동국악부(東國樂府)》 《원교집선(圓嶠集選)》 《원교서결(圓嶠書訣)》 등이 있고, 글씨에 《영의정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등이 있다.
유상운 [柳尙運, 1636~1707]
조선 후기의 문신. 서인이고, 서인이 분당되자 소론에 속하였으며,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가 일어나 장희빈까지 연루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賜死)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되고, 1702년 직산에 유배되었다가 1705년 중추부행판사로 복직되었다.
본관 문화(文化)
호 약재(約齊) ·누실(陋室)
별칭 자 유구(悠久), 시호 충간(忠簡)
본관 문화(文化). 자 유구(悠久). 호 약재(約齊) ·누실(陋室). 시호 충간(忠簡).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고, 16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등을 지냈다. 1679년(숙종 5) 문신정시에 장원, 1680년 대사간에 특진되었다. 이때 서인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남인에 의해 추대되었다 하여 복성군(福城君)을 탄핵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683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서인이 분당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 김석주(金錫胄)의 전횡을 탄핵했다. 1685년 호조판서 등에 이어 형조판서를 지냈다.
1694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비방하는 서한을 장희빈(張禧嬪)에게 보낸 장희재(張希載)의 처형을 둘러싸고 노론의 반대에 부딪혀 사직, 성밖에서 대죄했다. 그 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1698년 영의정 때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삭직당했다. 1699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나 당쟁을 일삼는다는 노론의 탄핵으로 중추부판사가 되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가 일어나 장희빈까지 연루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賜死)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되고, 1702년 직산(稷山)에 유배, 1705년 중추부행판사로 복직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나주(羅州)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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