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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낸 부자 [이덕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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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5:18 조회2,1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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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하늘이 낸 부자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 조선일보. 2008.4.25 -

'부지런한 부자는 하늘도 못 막는다'는 속담은 근면하면 부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자도 한정(限定)이 있다'는 속담은 재산이 한없이 붇지는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큰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황현(黃玹)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북경(北京)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들먹인다"라고 전할 정도였던 임상옥(林尙沃)은 하늘이 낸 큰부자였다.

'개벽' 1923년 8월호는 임상옥이 판서(判書) 박모(朴某)가 궁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4000냥을 주어 장사를 치르게 한 것이 거부가 될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박모는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인데, 그는 누이가 순조의 생모 유비(綏妃) 박씨인 데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를 입었던 실세였다. 임상옥은 박종경의 후원으로 국경 지방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돈을 쓰는 방식에 있었다. '일성록(日省錄)' 순조 32년(1832) 6월 10일자는 그가 2070냥을 희사해 이재민을 살렸다고 전하는데, 의주 부윤(府尹) 남이형(南履炯)은 그가 이전에도 거금을 쾌척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임상옥은 이 공로로 곽산(郭山)군수에 제수되는데, 그 후에도 수재가 발생하자 거액의 의연금을 내어 헌종 1년(1835) 종3품 평안도 귀성(龜城)부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작년 섣달의 전최(殿最:인사고과)에서 중고(中考)에 들었다며 승진에 반대하면서 귀성부사 부임은 무산되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1939년에 쓴 '임상옥'이란 글에서 그가 다리를 건설하고 배를 희사한 사례 등을 들고 있지만 양인 출신의 고위직 진출을 눈뜨고 볼 수 없던 사대부들이 그를 끌어내린 것이었다.

'의주군지(義州郡誌)'는 벼슬에서 물러난 임상옥이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라고 전한다. 그의 시 중 한 구절이 '재물은 물처럼 평등해야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곧아야 한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는 것이다. 하늘이 낸 부자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돈을 쓰는 새로운 전범을 보여주는 제2의 인생을 사는 것도 버는 것 이상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박종경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
판서 준원(準源)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며, 누이는 순조의 생모인 유비(綏妃)이다.
1790년(정조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가 수렴청정을 하자, 지극한 총애를 입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으로 기용되고, 응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규장각에서는 직각(直閣)으로부터 직제학까지, 그리고 참찬을 거쳐 판서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804년 잠깐 여주목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매일 사방에 격문이 나돌자, 당시 훈련도감에 있어서 (軍心)을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1812년 호조판서가 되어 군국기무에서 공부(貢賦)까지 실권을 쥐었다.
이때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으로부터 임금의 인척으로 위복을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 탐내고 사적인 감정으로 살인하는 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내직에 들어
와 몇 년 후 훈련도감을 맡았다.
1814년에는 왕의 병에 시약(侍藥)한 공로로 안마(鞍馬),토지,노비를 하사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친히 제문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가통을 세우기 위해서 5대 이하의 유고를 모두 모아
《반남박씨5세유고 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하고, 선대의 묘소에 비석이 없는 곳은 모두 비석을 세웠다. 글씨로는 〈박준원신도비 朴準源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80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리로 승진 승지 홍문관제학 총융사
1809 병조판서
     1810 이조판서 훈련대장
     1812 호조판서 양주목사
             어영대장 판의금부사 좌참찬
             순조와 순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軍國機務에서 부터 貢賦까지도 장악 권세를 부렸다
中比로 이조판서에 오른 순조의 외척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왕의 권리를 강화할 목적으로 중비 제도가 이용되었다. 일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왕의 특면으로 벼슬을 주는 이중비 제도는 순조 때부터 와척들이 권세를 누리는 세도정치를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 되었다. 박종경은 순조의 어머니 유비 박씨의 집안이었다.
순조1(1800) 문과에 올라 병조판서로 있을 때 모략을 받아 양주에 내려가 있다가 중비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특히 외척들은 대개가 중비로 뽑혀 이조판서 병조판서 어영대장등 실권있는 자리를 맡았다. 조선말에 반남박씨가 높은벼슬을 한것도 유비박씨의아들인 순조의 외척이라는 배경 덕분에 이들이 모두 중비로 발탁된 데있었다.
순조0 7/4 전 (都事) 박종보(朴宗輔), 경모궁 영(景慕宮令) 박종경(朴宗慶)을 종척(宗戚)의 집사(執事)로 삼았다.
순조1 8/3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추도기(秋到記) (儒生)을 시험 보여, (講)에서 으뜸을 차지한 김익사(金益蜂)와 제술(製述)에서 으뜸을 차지한 박종경(朴宗慶)에게 아울러 (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 10/24 사과(司果) 박종경(朴宗慶)에게 부수찬을 제수하라.
     11/13 교리 박종경(朴宗慶),
    1 11/15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교리 박종경(朴宗慶)이 장차 영소(榮掃)의 행차를 한다고 하니,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元氏)의 묘에 요전상( 奠床)을 갖추어 주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해 보건대 이 (家門)의 사람이 (登科)한 것이 어찌 다만 개인의 다행뿐이 겠는가? 그의 처지를 위하여 지희(志喜)케 하는 행사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모레는 (承旨)를 보내어 사판(祠版)에 치제(致祭)한다는 뜻을 분부하고 (副護軍) 박종보(朴宗輔)는 승지를 제수하여 나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순조1 11/16 지금 듣건대, 교리 박종경(朴宗慶)이 장차 영소(榮掃)의 행차를 한다고 하니,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 원씨(元氏)의 묘에 요전상( 奠床)을 갖추어 주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해 보건대 이 가문(家門)의 사람이 등과(登科)한 것이 어찌 다만 개인의 다행뿐이 겠는가? 그의 처지를 위하여 지희(志喜)케 하는 행사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모레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사판(祠版)에 치제(致祭)한다는 뜻을 분부하고
순조1 11/16 박종경에 내린 과분한 하교를 거두어 달라는 박준원의 진소 》
    판돈녕(判敦寧) 박준원(朴準源)이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전교(傳敎)를 내리신 것을 보니, 신의 자식 박종경(朴宗慶)이 외람되이 과제(科第)에 오른 것으로써 특별히 은영(恩榮)을 이미 죽은 어미에 미루어 주시어 이미 본도(本道)로 하여금 요전상(僥典床)을 분묘(墳墓)에 갖추어 주도록 하시고 또 신의 자식 박종보(朴宗輔)로써 특별히 승지를 제수하시어 사판(祠版)에 치제하게 하시니, 총명(寵命)을 입은 바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이가 모두 영광입니다마는, 삼가 생각건대 부인(婦人)은 남편을 따르는 것입니다. 추증(追贈)에서 보고 치제하는 뜻도 역시 알 수 있으나, 신이 이미 세상에 있으니 지금 그 아내에게 별도로 뇌유( 侑)의 은전을 베푸는 것은 사리나 체면으로 헤아려 보면 아마도 미안한 점이 있고, 또한 어찌 예(禮)에 일컬은 부인 무묘(婦人無廟)란 뜻에 위배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그는 일생 동안 형포(荊布)의 생활로 조강(糟糠)도 배불리 먹지못하였는데, 죽은 뒤에 이 비상한 은수(恩數)를 입게 되니 틀림없이 그가 천대(泉臺)의 아래에서 두려워하며 몸둘 바를 알지 못하여 말을 하려 하여도 할 수 없을 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신의 처지로 말하더라도 그 아내를 영광되게 하는 것을 안연(晏然)히 무릅쓰고 받아서 위로는 조가(朝家)의 은전에 마음 편치 못 하고 아래로는 평일의 졸규(拙規)를 잊는다면,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동조(東朝)께 여쭈어 성명(成命)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치제의 거조는 정례(情禮)로 보아 당연하다. 내가 미처 창명(唱名)하던 날에는 두루 생각하지 못하였었는데,지금 다행히 자전께서 특별히 은전을 내리시니, 나에게도 더불어 영광이 있다. 경은 은영(恩榮)에 감격하여 칭송할 따름이다. 하였다.
순조1 12/13 교리 박종경(朴宗慶),
    2 3/12 내각(內閣)【제학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 검교 직각(檢校直閣) 이시원(李始源),김근순(金近淳), 검교 대교(檢校待敎) 서유구(徐有 )이다.】에서 회권(會圈)하였다. 직각(直閣) 5점은 박종경(朴宗慶)이었다.
     3/12 박종경(朴宗慶)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3/23 ..비국에서 어사(御史)에 합당한 사람 박종경(朴宗慶)으로써 초계(抄啓)하였다.
     7/22 박종경(朴宗慶)을 의정부 검상으로
     8/12 ..각 도감(各都監)의 상전(賞典)을 시행하였다. 都廳) 朴宗慶은 모두 가자(加資)하고,박종경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3 9/24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참의로,
    4 2/14 검교 직각(檢校直閣) 박종경(朴宗慶)이다.】 대교(待敎)의 5점에 박종훈(朴宗薰),
            박종훈을 대교로 삼았다.
    4 3/7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참의로,
     9/28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10/9 도당(都堂)【좌의정 서매수(徐邁修)우의정 이경일(李敬一)대제학 이만수(李晩秀) 우참찬 김면주(金勉柱)이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참의 박종경(朴宗慶)이다.】
     11/18 박종경을 부제조에
     11/24 박종경(朴宗京)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서영보(徐榮輔)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고, 박종경(朴宗慶)과 함께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가 곧 서영보를 부제학에서 체직시키고 박종경(朴宗慶)으로 대신하였다
     12/10 행 부호군 박종경(朴宗慶)의
    5 1/10 仁政門)에 나아가 朝參)을 행하였다. 朴宗慶를 발탁하여 아경(亞卿)으로 삼았는데,
순조5 2/2 예조 참판 박종경(朴宗慶)은 말하기를,
     2/18 판돈녕 박준원(朴準源), 성천 부사 박종보(朴宗輔), 검교직제학 박종경(朴宗慶)을 특별히 입직(入直)하라고 명하였다
     2/28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에게는 보국 숭록 대부를 가자하고, 성천 부사 박종보(朴宗輔), 예조참판 박종경(朴宗慶)에게는 모두 구마를 면급하였으며, 이어 표피(豹皮)노비(奴婢)전결(田結)을 차등 있게 내렸다.
     3/16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15 실록 교정 당상(實錄校正堂上) 박종경(朴宗慶)에게 계속 교수(校 )하는 직임을 살피라고 명하였다.
     6/15 박종경(朴宗慶)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에 차임하였다
     7/3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하게 하라고 명하였다.【감춘추(監春秋) 서매수(徐邁修), 知春秋 李集斗, 同春秋 吳泰賢 박종경(朴宗慶), 홍문관 제학 이익모(李翊模)이다.】 4점(點)을 받은 사람은 박종훈(朴宗薰)이다.
    6 1/6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박종래(朴宗來)를 한성부 판윤으로,
    9 5/21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7/25 박종경(朴宗慶)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9/10 박종경(朴宗慶)을 선혜청 제조에 차임하였다.
     9/12 특별히 박종경(朴宗慶)을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10/4 병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아뢰기를,
    10 2/2 진휼 당상(賑恤堂上) 박종경(朴宗慶)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5/9 박종경(朴宗慶)을 호조 판서로,
     9/5 .박종경(朴宗慶)을(通信使)의 행 이정 당상(行釐正堂上)으로 차출하였는데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9/9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2/13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을 통신사로 삼았는데,
     12/27 도정(都政)을 행하여【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참판 이존수(李存秀),참의 송면재(宋冕載)병조 판서 이면긍(李勉
             兢)이다.】 박종래(朴宗來)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순조11 1/2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5 박종경(朴宗慶)을 규장각 제학으로
     3/13 규장각 제학 박종경(朴宗慶)이 아뢰기를,
     4/24 박종경(朴宗慶)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4/29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사임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락하고, (朴宗來)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6/19 박종경(朴宗慶)을 예조 판서로,
     8/3 박종경(朴宗慶)을 호조 판서로,
     8/8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판서로,
     12/24행 대호군(行大護軍) 박종경(朴宗慶)은 아뢰기를,
순조12 1/7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22 박종경(朴宗慶)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5/1 박종경(朴宗慶)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박종훈(朴宗薰)을 보덕(輔德)으로, 박주수(朴周壽)를 겸사서(兼司書)로,             박종경을 제조로 삼았다.
     7/28 종부시 제조 박종경에게 정헌 대부를 가자하고,
     8/16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8/29 훈련 대장 이인수를 노병(老病)으로써 (特敎)로 체임을 허락하고 박종경(朴宗慶)을 제수하였다.
     11/3 박종경(朴宗慶)을 연접 도감 제조로,
     11/18박종경(朴宗慶)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11/30박종경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12 12/12우참찬 박종경(朴宗慶)
         22우참찬 박종경을 양주 목사로 제수하여
         27박종경(朴宗慶)을 공조 판서로,
    13 2/9 박종경(朴宗慶)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14 박종경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4/16 박종경(朴宗慶)을 예조 판서로
     5/19 박종경(朴宗慶)을 한성부 판윤으로,
     7/28 박종경(朴宗慶)을 우부빈객으로,
     9/9 박종경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1/7 박종경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순조14 2/16 예조 판서 박종경이 패소(牌召)를 어기므로
순조14 2/25 박종경을 사헌부 대사헌에 삼다
     3/12 박종경을 홍문관 제학으로,
     4/11 박종경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7/16 박윤수(朴崙壽)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박종경(朴宗慶)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12 박종경(朴宗慶)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순조15 1/4 좌참찬 박종경(朴宗慶)에게도 각각 안구마를 면급하고, 아들사위,동생조카 중에 한 사람을 첫 벼슬에 조용(調用)하였으며,
     2/17 박종경(朴宗慶)을 좌부빈객으로,
     4/11 특지(特旨)로 박종경(朴宗慶)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6/29 이조 판서 김이양(金履陽)을 병으로 체차하고 박종경(朴宗慶)으로 대신하였는데,
     8/8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0/17 박종경(朴宗慶)을 공조 판서로,
     12/10 박종경(朴宗慶)을 홍문관 제학으로,
     12/15 박종경(朴宗慶)을 원소 제조(園所提調)로 삼았다.
     12/16 원소 당상(園所堂上) 박종경(朴宗慶)과 양례 당상(襄禮堂上) 한용탁을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12/20 양례 도감 당상(襄禮都監堂上) 박종경(朴宗慶)이 말하기를,
순조16 2/19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
     3/14 박종경은 숭록(崇祿)의 품계로 올려 주고,
     5/10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아뢰기를,
     6/25 도정(都政)을 행하였다.【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 참의(趙貞喆), 병조 판서박윤수(朴崙壽)이다.】
     7/24 박종경(朴宗慶)을 호조 판서로,
     8/15 호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상소하여 큰
     9/16 박종경(朴宗慶)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순조17 2/19 문형 회권을 행하였다.【호조 판서 박종경(朴宗慶)
    17 3/11 박종경(朴宗慶)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16 판의금 박종경(朴宗慶)
     4/19 감동 당상(監董堂上) 박종경(朴宗慶)에게는 보국(輔國)을 가자(加資)하고,
     9/25 박종경(朴宗慶)을 좌부빈객으로
순조17 12/1 호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이 졸하였다.
작고한 호조 판서 박종경의 성복일(成服日)에는 근시(近侍)를 보내서 제를 올리게 하라. 제문은 지어서 내리겠다. 그리고 동원 부기(東園副器) 한 벌을 실어 보내고 여타 은졸(隱卒)의 전례(典禮)는 고 판서 상사(喪事) 때의 규례대로 거행하라.하였다.
박종경은 판돈녕 박준원(朴準源)의 차자(次子)이다. 박종경은 임금께서 즉위한 초년에 등제하여 10년이 채 못되어 정경(正卿)에 올라 원융(元戎)을 총섭(摠攝)하였는데, 대체로 처지(處地)와 기개(氣槪)가 족히 이렇게 될 만하였다. 전수(典守)에 있어서는 공시(貢市)에 원성이 없었고, 무어(撫御)에 있어서는 군졸의 칭송이 많아, 모두 왕가(王家)에 근로(勤勞)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학술이 적은데다 갑자기 요직에 기용되어 권세가 막중하고 지위도 높았지만, 때를 타서 교제하는 사람들은 바르게 타이르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정 사이에 서로 엇갈리는 의논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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