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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중에서>
고종39년(1902) (대한 광무(光武) 6년) 10월 24일(양력) 이주영 등이 황후로 높이는 의식을 아뢰다
특진관(特進官) 이주영(李胄榮)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폐하께서는 효성이 모든 임금들보다 뛰어나고 예의는 삼대(三代)의 임금과 대등하여, 조상을 높이고 근본에 보답하는 지극한 도리를 다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융릉(隆陵)을 추존(追尊)하고 오묘(五廟)를 추숭하셨는데 유독 그 다음으로 시행해야 할 현목 유비(顯穆綏妃)를 황후로 높이는 의식만 아직도 시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씩이나 됩니다.
전에 정승 조동만(趙東萬)의 상소문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정론(正論)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폐하께서 내리신 비지(批旨)를 보니 ‘이 예법은 지극히 신중한 것이므로 결코 갑자기 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 등은 응당 사가(私家)로 물러가서 다른 날 명이 내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삼가 생각건대 지난해에 추존할 때 감히 곧바로 황후로 높이자고 청하지 못하여 우선 비로 높이고 오늘이 되어서야 황후로 높이자는 청을 올렸으니 역시 갑자기 논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그 예법을 신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지극히 신중하게 여김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유비(綏妃)는 훌륭한 규범과 예법이 있는 이름 높은 훌륭한 가문의 태생으로서 여자로서의 그윽한 태도와 바른 성품을 가지고 덕을 길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왕궁에 선발되어 날을 받아 혼례를 치르고서 드디어 후궁으로 들어와 다른 후궁들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총애를 받았지만 효의 황후(孝懿皇后)가 황후로 계셨기 때문에 황후로 오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성인(聖人 : 순조(純祖))을 낳음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자손들이 뒤를 이어 억만년 무궁한 복스러운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아! 훌륭합니다.
천자의 비로서 천자의 어머니가 되고도 끝내 황후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상고할 만한 지난 시기의 역사책이나 원용할 만한 나라의 규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폐하처럼 거룩하고 명철한 자질로는 틀림없이 꿰뚫어 보고 계실 것이니, 신 등이 어찌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종묘(宗廟)의 아름다운 법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고 온 나라의 공론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명을 내리는 동시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좋은 날을 받아 황후로 높이는 의식과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들여놓는 의식 절차를 예의를 갖추어 거행하게 하소서. 그러면 폐하의 효성이 빛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조(宣祖)와 숙종(肅宗) 두 조상의 영혼도 저 세상에서 기뻐하실 것이며 대소 신민들도 모두 더없이 기뻐서 춤을 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대한 일이므로 선뜻 논할 수 없는 것인데 어째서 경솔하게 아뢰어 청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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