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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이산의 화평옹주와 화완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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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우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5:52 조회1,8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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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와 화완옹주
영조대왕과 영빈이씨의 1남3녀로 사도세자와 친동기간이다.
영조대왕은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다른 왕자나 옹주보다 유난스레 아꼈다.
그중 화평옹주는 심성이 곱고 너그러워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그런 화평옹주를 너무나 아낀 나머지 조선 경국대전에 나온 법상 혼일을 하면 궐밖으로 출궁을 해야하는데 부마와 함께 궐안에서 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화평옹주가 일찍 죽었다(방년 22)
이때부터 영조가 안그래도 사도세자를 구박했는데 심각하게 사도 세자를 구박하기 시작했다.(한중록에서 화평옹중가 죽자 혜경궁홍씨가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화평옹주와 달리 화완옹중는 애교가 많아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오만방자하고 질투심 많은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매우 싫어하여 나중에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부추기기도 하였다.
정조의 왕비가 되는 효의왕후 김씨 역시 화완옹주로부터 엄청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영조의 계비와 후궁무숙의와 같이 영조를 부추겨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자 화완옹주는 더욱 기세등등해 졌다.
그 때의 정치는 화완옹주의 치마폭에서 나온다고 해도 화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조가 사도세장를 죽인것을 후회하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세손으로 삼고 정조는 죽을 위기를 여러 차례 맞았으나 끝내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게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유배시킨뒤 사사하고 화완옹주는 궐밖으로 쪽겨나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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