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총애를 받은 딸(화평옹주)과 사위(박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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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5:54 조회2,023회 댓글0건본문
영조의 총애를 받은 딸(화평옹주)과 사위(박명원)
화평옹주(和平翁主)는 영조(英祖)의 셋째 딸로 영빈이씨의 소생이다. 1727년(영조 3)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으며 1748년 22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
박명원(朴明源,1725~1790)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尉)가 되었고
시호(諡號)는 충희(忠僖)이다.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글씨를 매우 잘 써 나라의 경사나 슬픈 일이 있을 때
10여 차례에 걸쳐 금옥보책명정서관(金玉寶冊銘旌書官)을 지냈다. 묘역과 신도비는 파주읍에 소재한 육군 제7663부대 내에 위치하며 묘역 구성은 옹주와 박명원의
합장봉분 1기와 묘비,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뒤로 곡장을 둘렀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비는 1790년(정조14)에 세운 비로 비신 172×74×45cm, 대석 43×127×97cm로 비문은
영조의 친필이다. 박명원 신도비는 묘역 100여미터 하단에 세워져 있는데 1790년(정조 14)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총높이
300cm, 비신 191cm, 폭 75cm, 두께 46cm이며 비문은 집자비(集字碑)로 정조(正祖)가 글을 짓고
전자(篆字)는 이양빙(李陽氷)의 글씨를 비문은 안진경(顔眞卿)의 글자를 모았다
※묘; 파주시 파주읍 파주 1리 57-1 (포병부대 내 )
박지원 (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소설가.
주요저서:《열하일기(熱河日記)》,《연암집(燕巖集)》,《허생전(許生傳)》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
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 ·러허熱河 ·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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