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142
  • 어제801
  • 최대1,363
  • 전체 308,176

자유게시판

반성부원군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박우형)

페이지 정보

박태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6:34 조회1,886회 댓글0건

본문

아래의 글은 천안 창서씨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에 대한 의견입니다.

반성부원군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글쓴이: 박우형 조회수 : 7 08.06.02 20:17
http://cafe.daum.net/bannampark/C6cE/311 안녕하십니까? 여러모로 수고 많으십니다.

제 고향은 지금 살고 있는 전남 목포에서 뱃시간으로 1시간정도 떨어진 안좌도 입니다.
이곳까지 우리 선조가 오게된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아버님 말씀으로는 弼(필)자 항렬에서 왔다는 말씀이 계셨고,
인터넷 검색해 본 결과 박필몽의 난과 관련해 그 형제
필량의 아들 박사공부터 연좌제로 인한 사건을 피하기 위해 내려왔다는 정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 내용인지요?
물론 반성부원군파는 박응순(조선 14대 선조의 장인)을 시작으로 했고
그의 딸이 의인왕후라는 사실은 최근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만,

반남박씨가 35개파정도 되고, 인구가 약 15만명 된다고
하고 그중 반성부원군파는 대략 5천명 내외정도 될 것인데,

제가 살고 있는 신안군 안좌면(안좌도)을 본적으로 하고
있는 반성부원군파만 해도 수백명 이상은 될 텐데,

이와 관련된 조상 뿌리찾기에 대한 정보가 미비해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하오니 많은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을 대신한 의견입니다>

박필몽 할아버지의 족보 기록부터 알려 드리면

계해보(1683년 발행) 기록에는 필몽할아버지 휘(이름)만 기록이 있으나
필량(1687년생 ~1718 졸)할아버지는 계해보 출간후에 출생하셔서 기록은 없습니다.

병술보(1766년 발행)에는
필량 할아버지와
사공(師恭 1710~1727) 无后(※孫이 없음)
‘경인생 정미졸 O室 연안김씨 父 胤’ 의 기록이 이 있습니다.

족보 기록으로만 보면 필량.사공 두분은 이인좌의 난(亂) 전(前)에 돌아가심으로 피해는 없고, 이인좌난 때 생존하셨던 필량의 둘째 아드님이신 사묵(師黙) 할아버지가 피해를 보신것 같습니다.

역신집안 이라도 양자간분은 피해가 없고 서자는 귀양가는 정도로 끝내고 친 자손(아들이나 손자의 경우)이라도 어린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 까지 죄를 유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8세에 돌아가신 사공할아버지가 결혼은 하셨으나 자손이 없는 무후(无后)로 기록 되어있으며
이 기록인 1766년도 발행한 병술보(족보)는 사건 발생(1728년 무신란)후 38년 뒤에 간행한것이라 실제로는 자손이 살아계셨더라도 소식이 없어 무후라고 기록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손이 피해를 보지않기위해 안좌도로 피신한것은 사실로 보여집니다.


<참고자료>

12세 휘 박응순(朴應順)    1526(중종 21)~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건중(健仲).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박씨의 아버지, 사간(司諫) 소(紹)의 아들이며, 고려말 명문의 후예이다.
     아우 응남(應男)과 같이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배웠다.
155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다음해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고,
1559년에 사복시주부가 되었으나 위법사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安陰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양모상(養母喪) 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565년 다시 기용되어 돈녕부주부․내섬시주부(內贍寺注簿)를 거쳐 용인현령이 되었다. 이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딸이 중전이 되자
1569년 潘城府院君․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그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였다. 평소 검소한 생활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정치에 일체 간여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국구(國舅)가 살아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의(靖懿)이다.
《박응순(朴應順) / 明宗 10 式年 進士 》
【시험년도】 명종(明宗) 10 (1555)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53
【본인 자】 건중(健仲)
【본인생년】 병술(丙戌) 1526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박소(朴紹)
【부친품계】 조산대부(朝散大夫)
【부친관직】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수보덕(守輔德)
【부친관직】 /지제교(知製敎)
【안항(형)】 박응천(朴應川)
【안항(제)】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응인朴應寅)

선조 7년 1월05일 박응순(朴應順)을 도총관으로

선조32년 7월27일 박동언(朴東彦)을 상의원 정으로,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아들이며 중전(中殿)의 동모제(同母弟) 이다]

선수13 11/1 영돈녕부사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 졸하였다.

박응순은 왕비(王妃)의 아버지로서 조금도 정사에 간여하는 습관이 없었고 마음을편히 갖고 고요히 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집안 생활이 사치스럽지 않아서 남들이그가 국구(國舅)인지를 알지 못했다.

숙종22 7/27 증 영의정(贈領議政) 박소(朴紹)에게 문강(文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에게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17세 휘 박필현(朴弼顯) 1680~1728 1-106 소-응순-동언-황-세주-태춘-필현
1680(숙종 4)~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태춘(泰春)의 아들이다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었으나, 1725년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간신의 아들이라는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
1727년 다시 사간원으로부터 필우(弼禹)․필기(弼#기66)․필룡(弼龍)과 함께 노론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였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하였으며, 정호(鄭澔)를 참소하여 유배시켰다는 등의 죄목으로 4형제가 모두 탄핵을 받
았다.
1726년 이인좌(李麟佐)가 상주로 이주하였을 때 그와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었으며,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만호(萬戶)의 집에서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짜고, 태인(泰仁)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마침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종형 필몽(弼夢)을 대장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1728년 3월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중앙에서는 그를 태인현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하였으나 곧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인좌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태인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구(金溝)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전주성에서 반란에 가담하기로 약속하였던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는 사태가 반군(叛軍)에게 불리하게 전개됨을 보고는 태도를 돌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하니, 반란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부하들이 모두 도주함으로써 반란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가속(家屬)들 몇 명만을 거느리고 아들과 함께 상주에 숨어 있다가 상주의 영장(營將) 한랄(韓$랄01)에게 사로잡혔는데, 지금 사대부는 남인(南人)․소북(小北)․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모두 이 반란에 가담하였으며 평안병사 이사성이 그 맹주(盟主)라는 흉서(凶書)를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아들 사제(師濟)와 함께 참수(斬首)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순종1년3월25일    이동양 등 153명의 죄명을 벗겨 주다 》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지난해 11월 18일의 지시를 받들고 죄인 대장에 오른 사람들의 죄명을 벗겨줄 데 대하여 토의하고 문건으로【이동양(李東讓),이범제(李範濟),이공윤(李公胤),이 중술(李重述),이덕사(李德師),이하택(李夏宅),이보욱(李普昱),이양조(李陽祚),김호(金浩),박상로(朴相老),박사집(朴師集),박사즙 (朴師緝),박필현(朴弼顯),박종일(朴鍾一),박태신(朴泰新),정권(鄭權),조재한(趙載翰),박제경(朴齊璟),박영빈(朴泳斌),이세화(李世和),박봉수(朴鳳壽),박귀수(朴龜壽),박기수(朴麒壽),박활원(朴活源),김주천(金柱天),박사관(朴師寬),박사민(朴師敏),박사침(朴師沈),박사제(朴師濟),박사찬(朴師贊),윤집(尹몢),윤단(尹캷), 박필우(朴弼禹),김익(金?),구성윤득명(尹得明),박필룡(朴弼龍), 박필호(朴弼虎) 이상 모두 153명이다.】보고하였다. 승인하였다.



17세 朴弼夢1668--1728 (현종9--영조4)         응순--동언--황|--세주--태춘--필현
,                                                                     |--세항--태진--필몽

자는 양경(良卿). 태진(泰進)의 아들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이후 사서․정언을거쳤다.
1716년 이른바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이 노론에 의하여 밀려날 때 지평에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소론 중의 준소계열(峻少系列)의 주요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이명의(李明誼)․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상소하여, 왕세제(王世弟: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4대신의 죄를 성토함으로써 신임옥사를 일으켰다.
그뒤 소론정권이 수립되자 지평․헌납․광주부윤․부제학․승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참찬이 되었다.
1723년 강화유수가 되었는데, 이듬해 관병(觀兵)의 제도를 부활하자고 건의하여 허락을 얻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실록청(實錄廳)에 사사로이 출입한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어 노론의 공격을 받고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소론 급진파인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유배지에서 나와, 반란에 가담한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의 군중으로 가 서울로 진군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竹島)에 숨었으며, 검모포(黔毛浦)로 가 잔당들과 다시 거사하려다가 무장현감 김몽좌(金夢佐)에게 붙잡혔다.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당하였고, 그 가문은 몰락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