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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21 18:17 조회3,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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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

연암공(휘 지원)에 대하여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적편을 언급하여 주셨는데,저 또한 연암공의 연보,행장,
묘갈명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적편에 현석공(휘 세채) 의 연보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저로서도 왜 연암공과 관련된 이러한
자료는 없는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며,이번 기회에
대종중에서 이런 문의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연암공의 선친에 대한 문제인데,제가 이미
지난 칼럼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선친께서 실제 서거하신
연세는 65세인데,왜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마치 선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소개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1900년 연암집이 편찬될 당시에 잘못된 기록이 후세에도
계속 이어 졌다는 부분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저로서는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착잡한 심정이 들며,이러한 오류에
대하여 대종중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번 기회에
답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의 대문호로 알려진 연암공의 선친에 대하여 왜
이리도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인지 그 점도 궁금합니다.

그야말로 한 인물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연보,행장,묘갈명을 전혀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
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까지 연암공의 선친은 신비의 베일에 쌓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앞으로 대종중에서 연암공의 선친에
대하여도 관심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요새 연암공의 생가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귀중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연암공의 방계조상되시는
박필현,박필몽공께서 이인좌의 난(1728년)에 깊이 연루되어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연암공의 3대저술중의
하나인 "허생전"의 배경에 이러한 이인좌의 난이 일부 소개
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건대,연암공도 방계조상이 관련된 만큼 충격을
받으셨을 것으로 생각하며,그러한 심적인 충격이 바로
"허생전"을 저술하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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