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박찬이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22 01:47 조회2,157회 댓글0건본문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는 후손은 지난날의 기록에 의하여 선조님들의 행적을 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거사는 이미 밝혀진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아직도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입니다.
묻혀 있는 과거를 찾아내 정리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지원 선조님이 9세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고, 학문에 전념하셨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영조의 사랑을 받다가 43세에 영조의 부마이신 8촌형(휘 명원)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쓰시고, 49세(정조)에 처음 관계에 진출하십니다.
정신적으로 이인좌 난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탄압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弼夢 弼顯님은 월촌하여 촌수가 멀며, 난이 일어났을 때 나이가 어렸고 장년기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경신보 1권 211면을 보면 연암공의 선친(諱 師愈)은 단명이 아니라 1703년에 출생하여 1767년에 졸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장은 대부분 졸 즉후 그 분의 후손 또는 가까운 지인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점들은 나열되고...
지금까지 지원 선조님의 행장이 세적편에 없다는 것은 직손들이 소홀한 탓이 아닐까요?
대종중에 여러 가지 답변을 요구하셨는데...
대종중에 기록이 있다면 다르지만
자료가 없다면 그 사유를 어떻게, 누가, 어떤 기구가, 무엇을 근거하여 발표 할 수 있을까요.
소종중에서 연보 또는 행장을 작성하여 대종중에 제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후손 중 한 분이 미친 듯 빠져들어 작성하고, 소종중의 검토를 거쳐, 대종중에 심사를 요청하여, 몇 차례의 첨삭을 거친 후 확정 수록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소종중에서 요구하지 않은 행장을 대종중에서 작성하여 수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대종중에서 작성한 내용이 소중중 구성원 중 한 분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족을 표했을 경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참고로
효종의 부마 孝靖公(諱 弼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대종중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행장을 수록하도록 승인을 얻는데 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80년 경신보를 만들 때까지는 자료를 수집하는데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은 정보(자료)를 수집할 수 없어 행장을 못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두르시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후손들 중 능력 있는 분이 많습니다.
반박인의 자랑이신 연암공의 행장을 세로운 세보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를 제기해 주신 승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내용 중 잘못된 표현은 저의 함량부족으로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곽공파 세보 편찬위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