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981
  • 어제801
  • 최대1,363
  • 전체 308,015

자유게시판

첨추공 휘 일원의 이애기 2.

페이지 정보

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4-13 00:10 조회847회 댓글0건

본문

그러나 얼마 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으로 옮겼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10년 병오(1786) 122일 자의 기사(記事)를 보면, 이 장악원 첨정으로 윤대(輪對)할 때 소회(素懷)를 품신(稟申)한 내용이 있다. 다음은 품신한 내용이다.

 


주상(主上)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한 후,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박일원(朴一源)이 그의 소회(素懷)를 아뢰기를, 신은 전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맡은 바 있어 일찍이 태묘악(太廟樂)과 사전(祀典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禮典)에 대해 삼가 생각하던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은 아악(雅樂)을 사단(社壇)과 황단(皇壇), 문묘(文廟)에 두루 쓰면서 유독 태묘(太廟宗廟)에 만은 쓰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조 을사년(1425, 세종7)에 거서(秬黍;기장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길이의 단위로 쓰였음)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병오년(1426)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특별히 황종(黃鐘)을 만들어 악률을 바로잡게 하여 태묘(太廟)의 제악(祭樂)으로 정하였습니다. 당상(堂上)에서는 응종(應鐘)의 율을 쓰고 당하(堂下)에서는 황종의 율을 써서 음()이 올라가고 양()이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여 만물이 무성해지는 뜻을 취한 것으로, 순 임금의 소악(韶樂)과 은나라 탕왕의 호악(濩樂)에 아름다움을 짝하였으니, 만세(萬世)에 이르더라도 실로 따라서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릉(英陵세종의 능)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속악(俗樂)을 쓰게 되었으니, 이른바 속악은 곧 당()나라의 이원(梨園宮中庭園) 음악입니다. 명황(明皇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촉()에 행행한 시기에 특별히 신라(新羅)에서 문안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이원의 악부(樂部)를 하사하니, 신라왕이 영광스럽게 여겨 종묘(宗廟)에 올려 마침내 신라와 고려의 종묘악(宗廟樂)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구(杖鼓)는 말갈(靺鞨)의 북이고, 필률(篳篥)은 오랑캐의 갈잎 피리이고, 해금(奚琴)은 해족(奚族)과 거란(契丹)의 거문고입니다.

당상(堂上)에서 황종을 쓰고 당하(堂下)에서도 황종을 써서, ()뿐이고 음()이 없어 오음(五音)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나라에 아악(雅樂)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아악이 있는데도 도리어 속악(俗樂)을 쓰는 것은 실로 밝은 시대의 흠되는 일입니다.

우리 선대왕(영조를 말함)께서 일찍이 장악원(掌樂院)을 이원(梨園)으로 칭하는 것을 금하셨고, 이원이라는 이름마저도 금하셨으니 어찌 이원의 음악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때 조정 신하들이 속악이 곧 이원의 음악이라고 진달하지 않았으니, 즉시 바로잡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아악을 쓴다면 필시 선대의 뜻을 계승하려는 우리 성상의 훌륭하신 효심에 빛이 날 것입니다.

경모궁(景慕宮)의 영신악(迎神樂)3()을 쓰는 것은 더욱이 의의가 없습니다. ()6()을 쓰면 악()9성을 쓰는 것이 예()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례(周禮)에 교단(郊壇)에서는 6성을 쓰고 사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