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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2차 교양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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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6:55 조회1,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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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2차 교양강좌를 여러분 종인을 모시고 활당공후 찬욱씨께서
야천공과 활당공 이야기(大東奇聞 原文연구)에 대하여 강의를 마쳤습니다


다음 3차 교양강좌는 7월 27일 (네째 금요일) 육군 박물관 연구관으로 계신 강신엽 교수님의 문순공(휘 박세채)의 예치론(禮治論)에 대하여 강의를 하실 예정입니다 많으신 참석을 바랍니다.

2008년 제2차 교양강좌

주 제; 야천공과 활달공 이야기 (대동기문 원문연구)
강 사; 찬욱(활당공 후)
참석자; 부도유사외 16인



     雜同散異
                 찬욱(활당공 후)
․ 왜 잡동사니인가?
․ ‘박부마와 명마’이야기
․ 雜同散異學(잡동산이학?)
(1) 반만년 삼한의 땅 이십만 겨레
선조들이 남기신 자취를 따라
배우고 가르치는 타는 정열은
후손의 앞길 밝힐 높은 봉화대 한 핏줄 큰 사랑 함께 나눈 우리여
피곤을 모르는 새 역사의 창조자여
※ 학문? 제사와 절 삼한(마한반남 ․진한서라벌 ․변한합천 冶爐야로현)     겨레와 민족
(2) 학이불염 교이불권(맹자公孫丑上편 논어 述而편 呂氏春秋 ‘子貢曰 學不厭智也 敎不倦仁也 仁且智 夫子旣聖矣’

․ 야천공과 활동공 이야기 (대동기문 원문연구)
(1) 박동현과 유성룡, 양난(임진, 정유)을 다스려내다.
(활당공이) (선조임금) 무자년에 문과금제하여 응교로 경연자리에서 (임금을)모실 때다. 조정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조총법을 시행하려 하니, 영의정 유성룡이 상감 앞에서 자신이(스스로) 총쏘는 모습을 보여소 거조(거동)가 자못 보기좋지 않거늘 (활당공이) (왕께)아뢰되 오늘 성상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지 마소서 성룡이 수상으로서 몸소 대전 앞에 서 총쏘는 모양을 보이니 어저 대신의 체모가 이렇고서 (나라를)중흥할 수 있으리이까 상감히 뻔히 바라보며 (아무말씀)대답도 하지 못하시더니 (경석을)파하매 서애공이 나오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활당공이) 진실로 옳았다” 하더라 옛사람이 “나라에 쟁신이 있으면 그 나라는 망(실)하지 않는다” 말하더니 이 어찌 (나라를)중흥하기에 부족하랴 (그)때에 (이로써) 양난을 (무사히) 다스렸더라(記聞)
최응구가 일찍이 “내평생에 대장군을 보았다”고 말하기에 내(安東人 김상와)가 (그게)누구냐 물으니 박학기(활당공의 字)라고 했다. (아니)학기는 선비(가 아니)오. 어찌 (그를) 대장군이라 하오? (최응구가)대답하였다. (曰)정축년 알성시에 학기가 (써낸) 답안 초고가 가장 훌륭하여 주위사람들이 미리 급제(할 것)을 축하하더니 정서를 막 완성하자(시험)시각이 이미 지났는데 대전별감이 어떤 (서로)아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비록 시각이 다 됐지만 내가 (너의 답안지를) (끼워)넣어 주겠다”(담당할수 있다)하니, 학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와 짰다면 (나는) 벌써 등과(급제)했겠다. (그리했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랴(부끄러움이 없었으랴)” 별감이 부끄러워 물러갔으니 이게 대장군의 용력이 아니라면 무엇이오.(속옥집)
․ 쟁신(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간하여 선도하는 신하)
․ 촉각
․ 징시
․ 余(我)
․ 탁과
․ 재(纔)비로소, 잠깐(부사)
․ 설(提)
․ 과(넘을, 걸터앉을)
․ 잉(이에, 인(因)하여
(2) 朴紹有深交得葬穴(梧窓雜記)
(原文, 공동연구함)









11세 휘 박소(朴紹)    1493년 12월24일(성종24)--1534(중종29)    文康公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 이조정랑 조년(兆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
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때가 戊午士禍(1498년=6살)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써 식견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26세) 향공(鄕貢)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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