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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793년 안의 현감으로 계시던 연암 박지원 선조께서 창건하신 화양재로 200여년간 여러차례 중수 하였으나 건물이 노후되어 우천 및 폭우시 누수등으로 건물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기에 현재의 건물 화양재로 1991년에 개축을 하였다.
구 재각을 헐고 터를 넓혀, 보다 큰 전통양식의 목조건물로 새로운 재각을 건축하고, 뿐만 아니라 합천묘역의 곡장보수.제목 조경사업등 재각 중건, 신도비각을 세우는 공사도 함께 하였다.
화양병사기(華陽丙舍記)(舊齋閣) 전략(前略) 세상에서 드러난 귀족이 가벌(家閥)이라고 칭하는데 반드시 먼저 반남박씨를 치는 것은 모두 선생(※야천)의 여경으로서 그 음덕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 야천 선조의 묘는 서울과 800리 거리로 시대의 선후는 200 여년 인데 성묘(省墓)를 제 때에 수호(守護)하지 못하고 그의 방법도 얻지 못해서 향화(香火)로 오래 궐(闕)하고 추목도 금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실로 후손의 크게 황공한바인데 외손인 이후(李候= 합천군수 李義逸로 1790년 화양재 알묘(謁廟) 참배)만 시켜 단독이 선사(善事)를 하게 하는 것이 어찌 우리 본손들의 부끄러움이 아닐까.
지금엔 선생의 후손으로서 같은 수령으로 당로한 자가 오인이니 당연히 우리부터 먼저 해야 한다고 해서, 이에 멀리 종제인 선산부사 수원(綏源), 족제 문경현령 이원(彛源), 족질 진주목사 종후(宗厚) 영덕현령 종경(宗慶) 등에 편지를 보내고 이후(李候)의 의거를 칭송해서 부끄러워하니 그제야 다투어 봉급을 내서 협조하고 대구판관 이단형(李端亨)도 이말을 듣고 말하되 “나도 또한 외손이다 어찌 합천군수만 시켜서 전미하게 하리오” 라고 했다. 또 7대손 사인(師認)은 그때 감영에 있었고 족제 임천군수 지원(知源)도 각기 다 출전(出錢)을 해서 전후의 입금이 모두 330양(兩)이 되었다. 그래서 제전이 팔렸던 것을 환매(還買)해 오고 제기가 깨진것은 칠한 목기로 장만 하는 한편 여전(餘錢)으로는 병사를 경영하였다.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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